“이자가 오르니 좋지만, 이러다 옛날 대우 사태 때처럼 큰 회사 하나 망할까봐 걱정입니다.” “7% 예금도 나올 것 같은데, 이번 달엔 참았다가 다음 달 가입하면 어떨까요?” “과거 저축은행 부실 사태 때 뱅크런으로 너무 고생해서 시시한 곳에는 돈 맡기긴 싫어요.”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 삼성역에서 역삼역에 이르는 2.4km 거리는 14개 저축은행이 모여 있어 ‘저축은행 강남벨트’로 불린다.

요즘 저축은행 강남벨트는 예금 손님들이 밀려 들면서 온종일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이자를 받기 위해 옮겨 다니는 ‘예금 쇼핑족’의 부활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2009년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저축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연 6%를 찍은 현장을 [왕개미연구소]가 직접 둘러 봤다.

◇ “셔터 내려” 몰리는 예금자에 저축은행들 “하루 100명”

20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선릉역 인근의 OK저축은행. 번호표에 찍힌 대기자 수는 77명.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 있는 대기 고객도 적지 않았다. 번호표 기계에는 ‘대기 시간 3~4시간 이상 소요된다’는 안내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강북에서 일부러 강남까지 원정왔다는 70대 은퇴 생활자는 “저축은행은 예금자 보호 한도가 5000만원이라서 큰 금액을 나눠서 가입하려면 강남벨트가 이동하기 편하다”면서 “예전에 부실 저축은행에 돈 맡겼다가 찾느라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큰 곳 위주로 거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60대 주부 이모씨는 “예금 만기가 되어 어제 오후 3시쯤 은행에 왔는데 업무가 일찍 마감되어 허탕쳤다”면서 “오늘은 은행 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일찌감치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날 1년 만기 예금 금리를 연 6%까지 올린 OSB저축은행 선릉지점은 오픈 후 2시간 만에 셔터문을 내려 버렸다. 은행 관계자는 “2~3%대 낮은 금리로 예금에 가입했다가 더블 이자에 놀라서 해지하고 재가입하는 고객들이 많다”면서 “중도해지 후 재가입 처리를 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하루 고객 수를 1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OSB저축은행의 전국 7개 지점은 모두 이날 업무를 조기 마감했다.

요즘 저축은행에선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볼 법한 ‘오픈런’이 벌어지고 있다. 20일 오전 10시 서초동 OSB저축은행과 강남 OK저축은행의 번호표 기계에 찍힌 대기자 수는 각각 43명, 77명이다./조선DB
연 6% 예금에 가입하려는 고객들이 몰리면서 20일 OSB저축은행의 7개 지점 업무는 조기 마감됐다.

◇저축은행 예금 금리, 열흘새 1.64%P 상승

‘자고 나면 오른다.’

요즘 저축은행 예금 금리 추이에 딱 들어 맞는 표현이다. 지난 11일만 해도 1년짜리 예금의 최고 금리는 연 4.81%였지만, 매일 오르더니 급기야 20일엔 6.45%를 찍었다. 저축은행에서 최고 금리를 주는 예금에 5000만원을 넣었다고 가정하면, 이자 갭(차이)이 70만원(세후)이나 되는 것이다.

재테크 전문가 박현욱(필명 슈엔슈)씨는 “예금 이자가 단기간에 급등하면서 차이가 커지니까 갈아타기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면서 “돈을 맡겼다가 이자가 더 높은 곳이 나오면 바로 빼서 다시 옮겨가는 눈치 싸움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서울권 저축은행의 A대표는 “이달 초에 시중은행들이 연 4.5~4.6% 고금리 예금을 출시했을 땐 하루 이틀 하고 그만할 줄 알았다”면서 “시중은행으로 뭉칫돈이 대거 빠져나갔고, 위기감을 느낀 저축은행 업계에 자금 유치 경쟁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시중은행과 저축은행의 금리 차는 통상 1%포인트 정도 벌어지는데, 시중은행이 금리를 확 높이면서 저축은행 예금 금리까지 역전해 버리자 대혼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자금 이탈을 방어하기 위한 ‘금리인상 도미노’ 현상도 나타났다. A대표는 저축은행 강남벨트에서만 매일 2000억원대 자금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의 아버지 역을 맡은 성동일은 "예금 금리가 15%인데 너무 낮다"며 한탄한다./조선DB

저축은행 관계자들은 시중은행 같은 금융 거인들이 자금을 빨아들이니 금리 인상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중은행들은 왜 앞다퉈 예금 이자를 올리면서 시중 자금을 흡수한 걸까. 전문가 설명을 종합해 보면,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 건전성 강화 규제다. 금융당국은 코로나 시기에 은행권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을 한시적으로 풀어줬는데, 이를 연말까지 정상화하라고 했고 이에 따라 은행은 예금을 받아서 돈을 채워 놓아야 했다.(※자금시장 경색 조짐에 놀란 금융당국이 20일 정상화 조치는 당분간 유예한다고 발표).

둘째, 강원도 레고랜드의 기업어음(ABCP) 부도 사태 이후 회사채 시장이 크게 위축됐고 시중 유동성이 말라버렸다. 회사채 발행이 막힌 기업들은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은행은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해졌다.

셋째, 7월부터 시행된 예대금리차(예금금리와 대출금리 차이) 공시다. 대출 금리가 오르는 만큼 예금 금리가 따라서 오르지 않으면, 그만큼 은행엔 이득이어서 ‘이자 장사를 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동안 깜깜이었던 은행별 예대금리차가 매달 공개되기 시작했고, 공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은행들이 예금 금리를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금 이자가 더블 됐네, 갈아타자 붐”

최근 저축은행권에 나타난 금리 인상은 업계 관계자들조차 ‘단기 오버슈팅’이라고 말할 정도로 속도가 가파르다. 저축은행 창구 직원들은 고객 예금을 중도 해지하고 다시 재가입하는 반복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차라리 당국에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거나 ‘대출받은 사람들이 걱정된다’는 말들이 나올 만도 하다.

금융지주사의 한 임원은 “10여년 동안 이어졌던 초저금리 시대가 저물고, 자산 가격 상승이 부추긴 빚 권하던 사회의 비정상이 정상화되기 시작했다”면서 “새로운 고금리 세상에서는 저금리에 물들었던 생각과 관념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금을 쥐고 있던 소비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예금 금리가 반갑다. 하지만 ‘언제까지 오를까’에 대한 고민도 동시에 커진다. 금리 고점 근처에서 자금을 2~3년 장기로 묶어두고 싶은 은퇴 생활자들이 특히 그렇다.

2011년 당시 부산저축은행 등을 비롯한 여러 저축은행들이 부실 경영으로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사진은 부산저축은행 예금자들이 시위하던 모습./조선DB

저축은행 관계자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연내 추가로 올릴 예정이고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으면 내년에 추가로 금리가 더 오를 수도 있으니 자금을 한꺼번에 다 가입하기 보다는 시기를 분산해야 유리하다”면서 “3~6개월 주기로 금리가 바뀌는 회전식 예금에 가입하거나 2~3%대 파킹통장에서 쉬면서 추이를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가령 목돈 1억원이 있다면 6% 예금에 3000만원 정도 넣고, 나머지는 파킹통장에서 기다리다가 더 높은 금리 예금이 나오면 다시 3000만원을 넣으라는 것이다. 업계 내부에서조차 ‘오버슈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금리가 단기 급등했기에 다시 내려갈 가능성이 있어서다. 실제로 지난 19일 첫 6% 예금을 내놨던 상상인저축은행은 고객이 몰려 자금 수요를 달성하자, 바로 다음 날 금리를 5.7%대로 낮춰버렸다.

낮은 금리로 예금에 가입했던 고객들은 중도 해지로 인해 손해 보는 이자와 새 예금에 가입해 얻을 수 있는 이자를 계산해 보고 환승 득실을 따져봐야 한다. 중도 해지의 경우, 가입 당시 약정 이자는 다 받지 못하며 가입 기간에 따라 절반 정도의 이자만 받을 수 있다.

저축은행 79개사의 예적금 금리 비교가 가능한 저축은행중앙회 소비자포털에 사람이 몰려 21일 오후 5시경 접속이 지연되고 있다/뉴스1

저축은행은 1인당 5000만원까지만 예금자 보호를 받는데, 이때 원금과 이자를 다 합친 금액이 기준이 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예금 이자가 연 6%라면, 원금은 4700만원 정도가 적당하다.

재테크 전문가 박현욱씨는 “저축은행 예금은 예금자 보호 대상이긴 하지만 문 닫는 경우 실제 원금을 돌려받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려 마음 고생이 심할 수 있다”면서 “1인당 원금 2000만원까지는 부도 직후에 바로 돌려주므로(가지급금), 부동산 PF 부실 등으로 불안하다면 2000만원씩 쪼개서 가입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