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물어보자. 만약 당신이 벌어들인 돈에 45%의 소득세와 4.5%의 지방소득세, 합계 49.5%(현행 최고세율)의 세금이 부과되고, 거기에 덧붙여 고액의 건강보험료까지 부과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지. 나는 대부분 최고세율로 세금을 내는 사람이었고, 이건 가진 자의 당연한 납부 의무라고만 줄곧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생각은 몇 년 전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원래 나는 정치판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조국 사태가 있었을 때 내 머리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언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 그러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조국백서’와 ‘조국흑서’를 읽었고, 제임스 볼이 쓴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아주 좋은 책이다)도 읽었고, 귀화 러시아인 박노자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 강의’(한국 상황이 많이 나온다)도 읽어 보았다.
아울러 우리나라 좌파 중 최고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친구(이름과 지위만 대면 알 사람)에게 우리나라 좌파 계보에 대해 개인 과외까지 받았다.
그때 그에게 물어본 것이 있다. “너는 한국에서 고소득자들이 세금을 몇 퍼센트나 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의 대답은 “20~30%”였다. 그때 내가 던졌던 말은 이렇다. “너 같은 놈이 그 자리에 있다니…”(당시 최고세율은 46.2%였다)
사람들은 진짜 부자들이 어떻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것이 내가 20여 년 전에 세상에 처음 글을 던지기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이 글 역시 이에 해당된다.
지난 21일 조선일보에 쓴 ‘1년에 1억 넘게 내던 건강보험료, 열 받아 3분의 1로 줄였다’는 칼럼(제목은 내가 붙이는 것이 아니다)에 댓글(조선닷컴+포털)이 1000개 가까이 달렸다고 들었다. 건강보험료 고액 납부자에게 하다못해 감사 문자라도 자동 발송하라고 하거나 특진비 몇 천원 중 일부라도(내 뜻은 ‘1000원이라도’였다) 할인해 주는 예우를 하라는 내용이 특히 논란이 됐던 것 같다.
그런데 내 뜻을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다. 나도 4인 가족 건강보험료가 월 900만원 수준이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내자고 가족에게 얘기했다. 사회 환원이라고 생각하고 선뜻 냈던 금액이 1100만~1200만원으로 올랐기에 돈이 아까워서 400만원으로 낮춘 것이 아니다(그게 아깝게 생각되었다면 내가 법인 돈도 아닌 내 개인 돈을 이미 수십억 기부했겠는가. 법인 주주는 세금 때문에 개인 돈 1억이 법인 돈 2억에 육박한다는 것도 알아두어라).
건강보험료에 반감이 생긴 이유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치료 항목들이 야릇하게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중 상당수는 내가 볼 때 일부 의료진의 호주머니 채우기에 불과한 불필요한 것들이 많았고 그런 치료를 주로 받으러 다닐 사람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권 꼼수로만 보였다.
게다가 이 땅의 국민 중에는 여전히 극심한 가난으로 건강보험료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동반 자살 뉴스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 마당에 무슨 거창한 인류애 정신이 있는 나라인 양, 단기 체류 외국인들에게까지 거의 제한 없이 건강보험을 적용시켜 주는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특히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상호주의도 없이 투표권까지 준다는 것은 정치적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결국 정부는 나 같은 부자를 예우하기는커녕 건강보험료 화수분 취급을 할 뿐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아까워서가 아니라 많이 내고 싶은 마음이 다 사라져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험료를 줄였다. 가진 자가 하여야 할 사회 환원은 기존에 하여 온 기부를 확대하면 된다는 판단 하에 줄인 것이다.
아, 물론 일가족이 모두 해외로 나가서 1개월(2020년 7월부터 3개월로 강화됐다) 이상 있다가 돌아오면 그 기간 보험료는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크루즈 여행이나 갈까도 생각했는데 크루즈 여행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그거 돌려받자고 외국으로 놀러 다니는 게 좀스러워서 안 했다.
건강보험료를 최고 수준으로 많이 내는 부자들은 보험료도 많이 냈으니까 본전의 일부라도 뽑으려고 동네 병의원을 자주 들락날락 하면서 의료보험 혜택을 많이 받을까? 실손보험도 보장을 많이 받도록 가입하였을까? 전혀 아닐 것이다. 부자들은 건강하니까? 아니다. 건강보험료와 별도로 부자들은 기부를 통해 병원을 이용한다.
대한민국 대형병원에 발전기금이나 후원기금 등으로 불리는 기부금을 내면 기부금 전액 혹은 일정 비율만큼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세액 공제는 국세청에서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기부를 받은 병원은 기부자에게 어떤 대우를 할까?
우선 병원 로비에 설치된 기부자 기념벽에 기부자가 동의하면 이름을 새겨주고(법인 기부인 경우에는 법인 이름) 기부자 예우를 해 준다(법인 기부는 법인 대표가 예우를 받는다).
예를 들어 종합검진은 1억만 기부해도 3년 정도는 부부가 무료고, 기부금의 일정 비율만큼 무료 진료 혹은 진료비 감면을 받을 수 있다. 또 1억 이상 기부자는 평생 병원 주차료가 무료다.
대형병원에 기부자가 낸 기금은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무슨 무슨 질병 치료 연구비’ 혹은 ‘저소득층 자녀 치료비 지원’이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용처도 정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병원 기부금은 영리 목적 사업이 금지되어 있는 우리나라 대형병원의 의료 수준을 높이면서 가난한 음지에도 손길이 닿게 하는 도구가 된다.
대형병원마다 사회복지 담당팀이 있는 주된 이유 역시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내 기부금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노숙자가 응급으로 입원하였는데 치료비 안 낸다고 해서 무조건 퇴원시킬 수는 없고 대형병원들이 돈이 넘쳐나는 곳도 아닌데 무상 치료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기부금을 활용하여 도와주는 것이다.
나 역시 사랑의 열매를 통해 그런 환자들을 도와주곤 했다. 한 번은 척추측만증이 심한 저소득층 여학생의 수술비를 전액 지원하기로 하고 권위 있는 의사에게 진찰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의사가 수술을 거부했다. 증상이 너무 심해서 수술 후에 받게 되는 고통이 수술 전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학생 어머니의 통곡하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또 한 번은 병명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중병에 걸린 여학생이다. 외국에서 새로 개발되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고가의 신약 투여 비용 지원 요청이 있었다. 병원에 방문하여 복지담당 직원들과 함께 그 부친을 만났는데 내 심장이 싸늘해졌다. 직업도 없는 저소득층이라는 중년 남자가 신발은 내 것보다 더 새 것이고 바지는 주름이 칼같이 잡혀 있고 외투는 브랜드 제품이고 양손은 기생오라비 손처럼, 또는 화투만 친 손처럼, 깨끗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원 취소를 내심 생각하였으나 중환자실에서 피골이 상접한 채 코에 파이프가 꽂혀 있는 환자 모습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담당자에게 액수 상관없이 지원하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건강보험공단에서 보험 심사 통과가 되어서 지원할 금액이 확 줄었다고 말이다.
진짜 부자들이라면 당연히 선한 의지로 종합병원에 그런 기부금을 낼 것이고 기부자로서 예우를 받으면서 그 곳에 가서 할인 혹은 무료 혜택을 받을 것이다. 나 역시 기부자이고 그런 내가 대형병원에 가서 건강보험제도의 혜택을 받으면서 진료비나 치료비를 낸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병원이 고액 기부자에게 하는 예우 차원에서 나의 가족 모두 무료 혜택을 받는다(무료 금액 한도가 있기는 하지만 적은 액수가 아니다).
서울대병원만 하더라도 1000만원을 기부하면 기부자와 그 가족 1인이 10년간 무료 주차를 할 수 있는 예우 카드를 발급받고 3년 동안 진료비 감면도 받게 된다. 1억을 기부하면 평생 예우카드를 발급받고 기부자와 배우자는 평생 진료비 감면 혜택을 받으며 기부자의 부모와 자녀까지도 10년간 진료비 감면을 받고 3년간 종합 건강검진비를 매년 100만원씩 지원받는다.
자, 그렇다면 수년 전까지 1년에 1억 넘게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였던 우리 가족의 경우는? 건강보험료 최고 수준 납부자들에게 최소한 명목상의 예우라도 하라고 내가 수 차례 건의하였건만 정부로부터 화수분 취급만 받아왔을 뿐이다. 그러니 합법적으로 낮출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건강보험료는 확 낮춰버리고, 어차피 기부는 해왔으니 대형병원에 몇 억 더 기부하는 것이 훨씬 기분 좋아질 것 같지 않을까? 그래서 그렇게 했다. 어차피 병원에 낸 기부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돕는 데 사용되고 방만한 건강보험공단 운영 경비로는 단 1원도 넘겨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번 칼럼은 3월 2일 출간될 내 책에는 실려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