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전 일본 닛케이가 버블 주가에 육박하는 때가 올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이번 주가 상승 기회를 잘 살려서 개인 자산을 투자 사이클로 돌리고 일본 경제가 도약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써야 한다.”(일본 네티즌 A씨)
일본 증시가 연일 최고치를 갱신하면서 ‘닌자개미’들에게 함박웃음이 찾아왔다. 14일 일본 대표지수인 닛케이평균은 3만3502.42엔으로 마감해 3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닛케이평균이 3만3000대 고지를 밟은 것은 거품 경제기였던 지난 1990년 7월 18일 이후 처음이다. 15일에도 닛케이평균은 장중 3만3767엔까지 오르며 상승세가 이어졌다.
✅일본 증시, 올해 벌써 31% 상승
닛케이평균은 올해만 벌써 31% 오르며 기염을 토하는 중이다. 같은 기간 18% 오른 코스피를 비롯, 미국 S&P500 지수 상승률(15%)까지 몽땅 압도한다. 돈 냄새 잘 맡는 여의도 운용업계는 “주가가 오르지 않아 ‘껌딱지’ 같았던 일본 증시가 달라지는 것 같다”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A운용사 대표는 “지난 1985년 플라자합의(달러 가치는 내리고 엔화 가치는 높임) 이후 일본은 경제 불황에 빠지면서 ‘잃어버린 30년’을 보내야 했는데, 미중 패권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거시경제 판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일본 투자를 더 늘려야 할 것 같아서 조만간 현지 출장도 떠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본 증시를 끌어올리는 건 외국인이다. 14일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는 최근 10주 연속 일본 주식을 쇼핑하면서 총 4조5000억엔(약 41조원) 순매수를 기록했다. 10주 연속 순매수 기록은 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참고로 최근 10주 동안 한국 증시에서 외국인 순매수 금액은 5조4000억원(거래소 자료)이다.
고토타츠야(後藤達也) 경제 칼럼니스트는 “지금까지 일본은 임금이 좀처럼 오르지 않아 소비가 늘지 않고 그래서 물가도 못 오르고 기업도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그런 일본 경제의 악순환이 끊어질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면서 “외국인 매수세가 주가를 밀어 올리고 뒤이어 또다른 매수세가 가담해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일본은 춘투(春鬪·매년 봄 벌어지는 기업과 노조의 임금 협상)에서도 기업들이 노조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먼저 임금을 올려줬다. 일본 노동조합총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805개 노조의 임금 인상률은 평균 3.8%에 달했다. 일본 기업의 임금 상승률이 3%대가 된 것은 1994년 이후 29년 만에 처음이다.
일본 언론들은 주가 상승으로 돈을 번 ‘닌자개미’에 대한 보도도 쏟아내고 있다. 지난 10일 TBS뉴스는 오사카에서 스마트폰으로 주식 투자를 하고 있는 한 남성을 인터뷰했다(아래 사진). 기자가 ‘오늘 수익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이 남성은 “오늘 주식 팔아서 1000만엔(약 9000만원) 벌었다”며 미소지었다.
에민 유르마즈 이코노미스트는 “디플레 시대에 일본인은 현금을 보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현재 펼쳐지고 있는 인플레 시대에는 투자를 해야 한다”면서 “2000조엔에 달하는 일본 개인 금융자산이 증시로 유입되면 닛케이평균은 2050년 최대 30만선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말했다.
✅PBR 1배 돌파한 도요타자동차
“도요타가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를 뚫었다!”
14일 일본 증시에선 증시 대장주인 도요타자동차(시총 1위, 288조원)의 PBR이 화제가 됐다. PBR은 시가총액을 순자산으로 나눈 것으로, 주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볼 때 활용한다. 1배를 기준으로 하는데, PBR이 1배가 안 된다는 것은 회사 가치가 청산할 때보다 더 낮다는 의미다.
세계 최대 자동차 판매회사인 도요타는 올초만 해도 PBR이 0.87배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13일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 상용화 계획’ 발표 이후, 주가가 5.1% 올랐고 14일에도 6.3% 상승(종가 2310엔)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이날 드디어 PBR 1배를 돌파하면서 ‘주가 열등생’ 딱지를 뗐다.
올해 일본 증시에서는 유독 PBR이 화두가 되고 있다. 도쿄증권거래소의 강한 압박 때문이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 4월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를 밑도는 상장사들을 대상으로 자본효율을 개선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통지했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관치’인데, 거래소가 이렇게까지 칼을 빼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일본 증시는 500개 주요 상장사 기준으로 PBR 1배 미만인 기업이 전체의 43%에 달할 정도로 저평가가 심각하다.
도쿄거래소의 경고는 성과를 거뒀을까? 최근 일본 증시 상승세에는 PBR 1배 미만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열풍이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5일 NHK에 따르면, 지난달 일본 상장사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3조2600억엔(약 30조원)으로, 월간 기준 역대 최대치였다.
한 증시 전문가는 “일본우정(우체국)이 지난 5월 발행주식의 최대 10%(3000억엔)까지 자사주를 사겠다고 발표했는데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라며 “주주환원에 별 관심이 없었던 무거운 기업들까지 자사주 매입에 나서는 걸 보면 일본에서 거래소 압박이 잘 먹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터키보다도 더 싼 한국 증시
제조업 강국인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증시 부양책이라면, ‘만년 디스카운트’에 시달리는 한국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래소 관계자는 “도쿄거래소의 액션은 매우 이례적이며, 자본시장 관계자들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는 관치”라고 했지만, 오히려 외국인 투자자는 이런 정책을 반기며 일본 주식을 사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의 PBR은 얼마나 될까.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기준 한국 증시의 PBR은 1.0배로 주요국 중 최저 수준이다. 경제가 파탄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터키(1.21배)보다도 낮다.
개별 상장사들의 PBR은 어떨까. 15일 한국거래소와 NH투자증권 자료를 토대로 살펴 보니, 우선주·스팩 등을 제외한 2332개 코스피·코스닥 기업 중 962개 기업이 PBR 1배 미만이었다. 전체의 41%로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참고로 미국 S&P500은 PBR 1배 미만 기업 비중이 5%이고 유로스톡600은 24% 정도다.
2023년 6월 기준 PBR이 가장 낮은 기업은 태광산업(0.13배)과 한신공영(0.13배)이었다. PBR이 0.13배라는 의미는 이론상으론 회사를 청산하고 주주들에게 순자산을 나눠주는 것이 더 낫고 상장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시장이 평가하는 것이다. 태광산업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일가가 54%를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2대(5.8%) 주주인 트러스톤운용이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승계 이슈가 주가 상승 발목”
‘PBR을 1배 이상으로 올려라’라는 일본의 증시 부양책은 한국에서도 통할까?
이건규 르네상스자산운용 대표는 “한국에서 대주주는 회사 자금을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내 돈을 왜 다른 개인 주주와 나눠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대주주가 회사를 팔 게 아니라면 승계 비용만 더 들기 때문에 주가가 오르는 것도 반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영진이 창업주에 가까울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고, 회사가 2~3세로 넘어오면서 지분율이 낮아지고 자칫 쫓겨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달라질 것이란 설명이다.
이 대표는 이어 “일본은 개인이 절대 주주가 아니라 금융회사 등이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래소의 증시 부양책이 더 잘 통한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지적처럼, 도요타자동차만 해도 최대 주주는 금융기관과 증권회사로, 전체 지분의 39.2%를 보유 중이다.
또다른 증권업계 관계자도 “유보금을 엄청나게 쌓아두고 있는 기업이 배당을 하지 않으면 여러 방법을 동원해 주주환원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일본에선 정부와 기업이 최적의 정책을 펴도록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하고 있어서 최근 주가 상승세에 호의적인 입장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일본처럼 저평가 상장사에 PBR을 1배 위로 높이라고 한다고 주가가 즉각 반응해서 오른다는 법은 없다”면서 “일본의 증시 부양책은 일시적일 수도 있지 않느냐, 금융당국은 한국 증시가 중장기적으로 상승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