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사는 72세 김종은(여·가명)씨는 약대를 졸업하고 40년째 현직 약사로 일하고 있다. 4년 전까지 직접 약국을 운영하다, 남편과 사별한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아르바이트로 약국에 나가 생활비를 번다. 30평대 마포 신축 아파트와 중형차를 갖고 있으면서 또박또박 연금도 받는다. 직장 생활을 하는 아들·딸보다 김씨가 더 부자라서 노후 걱정은 없다. 그는 “자식들에게 손 벌릴 일 없이 남은 인생 건강하게 즐겁게 살다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일러스트=박상훈
그래픽=양인성, 박상훈
그래픽=양인성, 박상훈

본지가 국내 4대 은행에서 만 65세 이상 고객이 가진 예금액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취합한 결과, 평균 27.1%였다. 노인 고객 수는 16.6%에 그치지만, 고액을 맡긴 사람이 많아 예금 비중은 10%포인트 이상 더 높았다. 한 시중은행장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를 겪고 있는 만큼, 앞으로 금융회사들의 가장 큰 승부처는 고령층 자산관리(WM)가 될 것”이라고 했다.

◇富의 46% 가진, ‘파워 실버’ 등장

우리나라 가계자산의 약 70%를 차지하는 부동산까지 합친 세대별 자산을 따져보면 60세 이상이 가진 순자산이 전체의 46%에 달했다. 2021년 서울연구원이 세대별로 보유한 금융자산(은행 예·적금에 전·월세 보증금)에 부동산과 자동차 등 실물자산까지 조사한 결과다. 1940~1954년 태어난 산업화 세대는 가구당 평균 3억3936만원의 순자산을 가졌고, 1955~1964년 태어난 1차 베이비붐 세대의 순자산은 전체 세대 중 가장 많은 평균 4억966만원이었다. 이들을 합친 노인 세대가 전 세대 자산의 절반 가까이 가진 셈이다.

호텔 뺨치는 실버타운 -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실버타운 '더클래식 500'. 2009년 문을 연 이곳은 보증금 9억원에 관리비 포함 월 500만원 이상의 생활비가 든다. /더클래식 500

이런 경향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도 비슷하다. 블룸버그와 금융정보회사 CEIC 등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1964년 이전에 태어난 세대가 미국 전체 가계자산의 69%를 가진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60세인 이들의 인구 비중은 약 30%지만 전체 자산의 거의 70%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도 2021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 가구가 가진 현금과 예금이 전체의 57.3%(626조엔) 수준이다.

우리나라 노인들이 다른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것은, 우리나라가 압축 성장하던 때 경제활동 최전선에 있었던 덕분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1975년에서 2022년 사이 우리나라 주거용 부동산 가격은 2318% 올랐다. 같은 기간 일본(107%)이나 미국(1247%) 상승률을 크게 뛰어넘는다. 주가지수(코스피)는 1980년 이후 지금까지 26배 뛰었다.

◇‘파워 실버 잡아라’ 기업들 발빠른 대응

많은 부(富)를 쥔 ‘파워 실버’ 등장에 기업들은 경영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KB국민카드는 최근 연회비 100만원짜리 프리미엄 카드를 출시하면서 ‘의료기관 동행서비스’를 혜택 중 하나로 집어넣었다. 고액 자산가 고객 중 검진서비스 등을 받으러 병원을 오갈 때 도움받길 원하는 수요가 있다고 보고 경쟁 카드 대비 차별화 포인트로 삼은 것이다.

우리은행은 최근 서울 돈암동과 서울 영등포 등 2곳에서 고령층에 특화한 일명 ‘효심(孝心) 영업점’을 열었다. 상담 창구 높이를 낮추고 큰 글씨로 볼 수 있는 ATM(자동화기기) 등을 배치했다. 폰뱅킹으로 모든 걸 처리하는 젊은 층과 달리, 고령층은 여전히 오프라인 영업점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신한은행도 서울 신림동에 ‘시니어 디지털 특화점포’를 냈다. 업무 목적별로 바닥에 ‘색상 유도선’이 그려져 있고, 번호표 발행기 화면을 키웠다.

기술 기업들도 대응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연내 출시를 목표로 노인들의 운동을 돕는 ‘입는 로봇’ 출시를 계획하고 있다. 미국 스타트업 렌데버는 VR(가상현실) 플랫폼 ‘알코브’를 통해 홀로 사는 노인들이 멀리 떨어진 가족들과 가상 공간에서 만나 얘기하거나 게임, 여행 등을 하면서 외로움을 줄일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놨다.

이창권 KB국민카드 대표는 “고령자의 학력, 건강, 경제 수준이 크게 높아지면서 이들이 더는 소외 계층이 아니라 핵심 소비 계층으로 떠오르고 있다”면서 “앞으로 이들을 겨냥해 최적의 상품을 내놓기 위한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