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개봉된 공상과학(SF) 영화 ‘그녀(HER)’에선 외로운 남성이 인공지능(AI) 챗봇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감독의 기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먼 미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영화 속에 그려졌던 ‘AI 여친과의 사랑’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일본 아베마TV는 최근 20~30대 여성 1000여명의 프로필을 보유하고 있는 데이팅앱 ‘사만다(サマンサ)’를 소개했다. 데이팅앱은 청춘 남녀들이 짝을 찾는 곳으로, 일종의 온라인 남녀만남 주선업체다. 여성들은 모두 20~30대로, 프로필엔 이름과 사진, 나이, 직업, 고향, 취미, 이상형, 음주·흡연 여부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본 데이팅앱 '사만다'에 등록되어 있는 여성 프로필 일부. 전부 AI가 만든 가공 인물이다. 7월 현재 무료 버전으로 1일 5회 호감 가는 여성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사만다 캡처

커플 매칭 방식은 여느 데이팅앱과 다를 바 없다. 남성이 호감 가는 여성에게 먼저 ‘마음에 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여성이 ‘대화 요청’을 수락하면 매칭이 성사된다.

그런데 ‘사만다’는 다른 중매 사이트와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바로 1000여명의 여성들이 모두 AI로 생성된 가공의 인물들이란 점이다. AI 여친(사만다)이 나오는 영화 ‘그녀’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데이팅앱 명칭도 ‘사만다’라고 한다.

‘마음에 든다’는 메시지를 보낸다고 해서 모든 여성과 커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일부 여성들은 메시지에 답장을 주지 않기도 한다.

여성들은 모두 AI 세계에서 각자 직업을 갖고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 있는 남성이 말을 걸어도 바로 답해주지 않는다. 가령 21살 대학생인 미호씨는 밤에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빠서 남성이 말을 걸어도 바로 답장하지 않는다. 야근이 잦은 25살 간호사 미사키씨는 평일 대낮에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한다.

사만다 운영업체인 Goke 측은 “여자친구가 있는 남성도, 심지어 기혼 남성도 자유롭게 본인 취향에 맞는 대화 상대를 찾아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면서 “번거로운 본인 확인 절차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아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를 다룬 영화 '그녀'(Her)의 한 장면./조선DB

✅데이팅앱 7조원대 폭풍 성장

전세계 데이팅앱 시장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모바일 데이터 분석 플랫폼인 앱애니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 전세계 데이팅앱 시장 매출 규모는 30억달러(약 3조7800억원)에 달했다. 한국도 데이팅앱에 800억원이나 쓰는 큰손 고객이다. 지난해 데이팅앱 시장 규모는 59억달러까지 커졌다는 추정도 나온다.

시장경제 분석이 전문인 ‘메르의 블로그’ 운영자 메르씨는 “데이트 상대를 찾는 방식은 온라인 앱으로 진화하는 중인데, 코로나로 대면 교류가 줄면서 대세가 됐다”면서 “데이팅앱 대표 주자인 매치그룹(틴더·매치닷컴 등)은 최근 5년간 연평균 20% 성장률로 무섭게 확장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솔로 공화국’ 일본에서도 데이팅앱은 성행 중이다. 어렸을 때부터 인터넷을 접한 일본 젊은이들은 온라인으로 맺는 관계에 대해 거부감이 낮다.

메르씨는 “오프라인에서의 이성 만남을 부담스러워 하는 일본 초식남들에겐 현실 세계의 여친보다 AI 여친이 더 친밀하게 느껴질 것”이라며 “요즘 청춘들은 실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사이버 공간에서 교류하는 것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이런 AI 여친과의 데이팅앱이 유행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남성 생애미혼율(50세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인구 비율)이 2020년 기준 28.3%에 달한다. ‘잃어버린 30년’으로 경제가 장기 저성장 늪에 빠지면서 월급이 좀처럼 오르지 않자, 일본 남성들은 연애와 결혼을 포기했다. 참고로 한국 남성의 생애미혼율은 2020년 기준 16.8%로, 아직은 일본의 2000년대 초반 수준이다.

현재 한국에는 약 170개의 데이팅앱이 운영 중이다. 일본의 AI 여친 데이팅앱인 ‘사만다’가 한국에서도 등장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설사 그런 앱이 출시되어 애용한다고 해도 썸타는 인간 여성에게 AI 여친이 있다(혹은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20대 여성 정모씨는 “만약 썸남에게 AI 여친이 있었다는 과거를 알게 된다면 사회성이 부족하고 인간 관계에 노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크게 실망할 것 같다”면서 “심심풀이 대화 용도로 사용했다면 괜찮지만, AI 여친을 남녀 사이에 감정을 공유하는 관계로 여기고 있다면 헤어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