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리 인상이 사실상 끝났다’, ‘연내 인하로 돌아설 수도 있다’는 예상이 쏟아지던 올봄, 같은 기대 속에서 미국 장기채 투자에 나섰던 왕개미 A씨는 요즘 계좌를 열어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그가 채권 매수에 나선 지 네댓 달 만에 채권형 상장지수펀드(ETF)와 알채권(개별 채권 직접투자) 수익률이 나란히 마이너스 10%대를 기록 중이다. A씨는 “만기 돌아온 예금까지 모아 채권에 베팅했는데, 금리가 이 정도로 오를 줄은 몰랐다”면서 “금리가 언젠가 떨어지긴 하겠지만, 너무 빨리 움직인 것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든다”고 했다.
채권 금리 하락(가격 상승)을 기대하며 발 빠르게 움직였던 채권 개미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올 4월 중순까지만 해도 내려가던 채권 금리가 최근 빠르게 상승하면서 손실이 나고 있기 때문이다. 채권 금리가 투자자들 예상을 깨고 빠르게 오르는 데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생각 같지 않네”…'4대 악재’ 만난 채권 개미들
지난 3일(현지 시각)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4.189%까지 올랐다. 작년 가을 4.2%수준까지 오르며 금융 위기 이후 최고까지 치솟았던 데 맞먹는 수준이다. 20년물, 30년물 등도 추이가 비슷하다.
아래로 방향을 잡던 장기물 금리가 다시 오르는 데는 일단 미국 경제가 걱정과 달리 침체를 겪지 않을 것 같다는 장밋빛 전망이 작용하고 있다. 경제 전망이 어두울수록 안전 자산인 채권 수요는 늘어나는데, 지금 반대 상황이 됐다.
미국채 큰손인 엔캐리 자금이 본국으로 귀환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점도 채권 투자 심리를 약화시키고 있다. 일본은행(BOJ)이 최근 일본 국채(JGB) 금리 상한선 인상을 용인하는 조치를 내놓으면서, 자국 내 금리가 즉각 올라가기 시작했다. 초저금리 엔화를 빌려 미국채 등에 투자하던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빠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대로 채권 공급은 늘어날 상황. 최근 미국 재무부가 3분기에 당초 예상(960억달러)보다 많은 1030억달러(약 134조원) 규모 장기채 발행 계획을 내놨다.
결정타는 신용 평가사 피치의 미국 신용 등급 강등이었다. 지난 1일 피치는 미국 국가 부채가 우려스럽다면서 최고 등급인 AAA였던 미국 신용 등급을 한 단계 아래(AA+)로 낮췄다. 국가 신용 등급이 낮아지면 이론적으로 국가는 더 비싼 금리를 주고 돈을 빌려야 하고, 이런 상황이 국채 금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장기채 ETF 평균 수익률 -10%대
올 들어 서학개미 순매수 1위 종목은 테슬라도, 애플도, 나스닥 지수를 추종하는 QQQ도 아닌 ‘디렉시온 데일리20+년 미국채 불3배’라는 상장지수펀드(ETF)다. 이 종목은 20년 이상 장기채 하루 움직임의 3배를 좇는 초고위험 상품으로, 올 들어 이달 2일까지 서학 개미들이 총 7억4139만달러(약 1조원)어치를 순매수했다. 듀레이션(남은 만기)이 긴 채권일수록 금리 하락기에 가격 상승 폭이 크다고 해서 장기채 투자가 유행처럼 번졌다. 서학 개미 순매수 상위 10종목 중 총 4종목이 이런 미국 장기채 ETF로, 총 1조8000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웬만한 장기채 ETF의 최근 6개월 수익률이 -10%대, 가장 많이 산 3배 레버리지 ETF 수익률은 -29%를 기록 중이다.
국내 시장에 상장돼 올해 투자금을 쓸어 담은 KODEX미국채울트라30년선물(H), ACE미국30년국채액티브(H)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 미국채뿐 아니라 장기 국고채에 투자하는 KBSTAR KIS국고채30년인핸스드, TIGER국고채30년스트립액티브 ETF 등도 최근 6개월 수익률이 마이너스 두 자리대를 기록 중이다.
앞으로 금리 전망은 안갯속이다.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3일(현지 시각) CNBC 인터뷰에서 “지난주 미 국채 100억달러어치를 사들였고, 이번 주에도 그만큼 샀다”며 “걱정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 국채”라고 했다. 미국채 가치가 추락하는 일은 그의 시나리오에 없다는 얘기다.
반면 코로나 폭락장 때 큰돈을 번 해지펀드 퍼싱스퀘어의 빌 애크먼 회장은 미 국채 30년물 금리가 5.5%까지 오를 것(현재 4.2%대)으로 보면서 “30년물에 공매도 투자를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