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게 싫어서 단스예금으로 오래 갖고 있었는데, 내년에 신권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세무서에 신고해야 하나요?”

2024년 7월 새 지폐 발행을 앞둔 일본에서 ‘단스(タンス·장롱)예금’ 보유자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단스예금은 은행 같은 금융회사에 맡기지 않고 안방 옷장이나 개인 금고에 보관하는 현금을 의미한다. 단스예금은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 동향을 살필 때의 중심 지표다. 일본은행(BOJ)이 매년 정기적으로 단스예금 추이를 발표할 정도다.

3일 일본은행에 따르면, 일본 가계의 단스예금은 매년 늘어나 지난 3월엔 107조엔(약 967조원)에 달했다. 내년도 우리나라 예산(657조원)을 크게 웃도는 뭉칫돈이 안방 장롱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단스예금의 대부분은 60대 이상 고령층이 보유하고 있다. 일반 가정용 금고에 1만엔 지폐를 꽉꽉 채우면 4억엔(약 36억원)까지 들어간다고 한다.

내년 7월에 디자인이 바뀌어 나오는 일본 지폐는 총 3가지(1000엔, 5000엔, 1만엔)로, 전부 새 인물로 바뀐다. 3D 홀로그램 위조 방지 기술이 세계 최초로 탑재된다. 사진에 보이는 화폐가 신권이다./로이터

일본은 전통적으로 현금 선호 현상이 강하긴 하지만, 특히 고령층이 단스예금을 좋아한다. 크게 5가지 이유가 꼽힌다.

첫째, 은행 ATM에 가지 않고서도 언제든지 원할 때 돈을 쓸 수 있어 편리하고, 둘째, 금융회사가 문 닫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셋째, 상속 시점에 재산 동결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넷째, 정부에 내 재산을 노출하지 않아도 되고, 다섯째, 가족에게 알리지 않으면서 돈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산가들은 단스예금을 가족을 위한 절세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일본은 전세계에서 상속세율(최대 55%)이 가장 높기 때문에, 세무당국 모르게 장롱 속 현금으로 물려줘야 가족이 절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돌아가신 어머니 옷장 안에서 돈다발을 발견했는데, 이 돈도 상속세 신고 대상인가요?’ 등 뒤늦게 발견된 단스예금에 관련된 질문들이 많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그런데 일본 정부가 내년 7월부터 신권을 유통한다고 발표하면서 단스예금 보유자들이 좌불안석이다. 일본은 위폐 방지를 위해 20년 주기로 화폐 디자인을 바꾸고 위변조 방지 기술도 업그레이드한다. 고령자들은 단스예금이 위법은 아닌지, 혹시라도 신권으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세무조사 대상으로 잡히게 되는 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일본 가정의 단스예금은 고령화와 맞물리면서 사회적으로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도난, 화재, 분실 등의 위험이 대표적이다. 지난 해 일본 경시청에 들어온 현금 분실물 신고 금액은 총 40억엔이었는데, 1940년 이후 역대 최대치였다. 노인들이 단스예금이 있다는 사실을 병에 걸려서 혹은 치매로 기억하지 못한 채 사망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쓰레기장에서는 현금 다발이 종종 발견된다. 올 초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한 쓰레기 처리장에선 1억원 상당의 지폐가 종이더미에서 발견되면서 화제가 됐다.

지난 1월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쓰레기 처리장에서 발견된 1억원 상당의 돈다발. 일본 각지에서 16명이 '내 돈'이라고 주장했지만 증거가 없어 전액 삿포로시에 귀속됐다./일본TV

수십 년 동안 장롱이나 금고 속에 숨어있던 돈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인가. 금융권에선 단스예금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에바타요시아키(江幡吉昭) 아레스패밀리오피스 대표는 “단스예금을 상속세 절감 대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년에 신권이 나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며 “신권 발행 이후에도 구권은 계속 사용할 수 있지만 만약 은행 창구에 구권을 대량으로 갖고 가면 돈세탁, 세금탈루, 은닉자금 등으로 의심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전세계적인 물가 상승세가 단스예금 보유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현금을 보유하는 것이 불리하기 때문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일본은 초저금리로 은행 예금 금리가 0%대이니 금융회사에 돈을 맡길 필요가 없었고 단스예금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면서 “하지만 기업 실적 향상으로 일본 증시가 꾸준히 상승하면 단스예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여전히 현금 쟁이기가 우선인 일본과 달리, 한국에선 은행 예·적금 예치가 더 인기다. 시중금리가 오르면서 금융회사에 맡기면 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꽁꽁 숨어있던 돈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올 상반기 고액권인 5만원 지폐 환수율(발행액 대비 환수액 비율)이 77.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신사임당 지폐가 시중에서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다는 의미다.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소속 조영욱 부장(세무사)은 “한국에선 상속세를 계산할 때 금융자산 2억원까지는 비과세되는데 단스예금(현금)이라면 제외된다”면서 “세금 신고가 되지 않은 재산은 향후 부동산 취득 시 자금 출처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도 알아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