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 세계 경제를 뒤흔든 ‘킹달러’ 현상이 다시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가파른 금리 인상이 달러 초강세를 이끌었다면 올해는 글로벌 침체 우려가 깊어지는 점과 유가 급등으로 재차 인플레이션 조짐이 보이는 것이 달러 강세를 부추기고 있다. 반면 유로존을 비롯해 한·중·일 등 주요국은 경제 체력 약화와 미국과의 금리 차 등으로 통화 가치가 추락하며 힘을 쓰지 못하는 형국이다.
◇지난해 이어 ‘킹달러’ 재현
12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유로화, 엔화 등 주요 6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지난 11일 기준 104.57을 기록했다. 지난 8일에는 105.09를 기록했는데 이는 지난 3월 9일(105.31) 이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105를 넘어선 것이다. 달러인덱스는 지난 한 달여간 5.3%나 올랐다. 불과 2개월 전만 해도 달러인덱스가 1년 3개월 만에 100 밑으로 떨어졌던 상황과 비교하면 극과 극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당시 달러인덱스는 미국의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대비)이 2021년 3월(2.6%) 이후 가장 낮은 3%까지 떨어지면서 급락한 바 있다.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잡히면서 미국 연준이 금리를 추가로 크게 올릴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봤다.
하지만 이후 국제 유가가 배럴당 90달러대를 기록하는 등 크게 오르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 속에 지난해 6월(9.1%) 이후 한 번도 오른 적 없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7월에는 다시 3.2%로 고개를 든 것이다. 금리 인상 사이클이 더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달러 가치는 이후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여기에 국내총생산(GDP) 순위 세계 2위와 4위인 중국과 독일 경제가 최근 크게 휘청이는 모습을 보이면서 글로벌 침체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점도 대표적 안전 자산인 달러 가치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이 됐다. 지난해에는 연준이 기준금리를 9개월 만에 4.25%포인트(연 0.25→4.5%)나 올리면서 ‘킹달러’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올해는 네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1%포인트(연 4.5→5.5%)만 올렸음에도 비교적 강한 수준의 달러 강세가 나타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미국 금리가 22년 만에 최고 수준이어서 연내 한 번 정도 더 금리를 올리거나 현 상태가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지난해와 같은 ‘킹달러’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며 “금리뿐 아니라 미국 이외 주요국들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은 환율 개입 나서
주요국은 킹달러 위세에 눌려 달러 대비 환율이 걷잡을 수 없이 급등(통화 가치 하락)하자 중앙은행과 금융 당국이 노골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며 제동을 걸고 있다. 달러 대비 위안화 가치가 16년 만에 최저치까지 떨어진 중국과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3개월가량 140엔대에서 고공 행진 중인 일본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경우 최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7년 넘게 이어온 마이너스(-) 금리 정책의 해제 가능성까지 언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미국과의 금리 차가 과도하게 벌어지는 데서 비롯된 엔저(低)를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다. 중국 인민은행이 지원하는 외환 자율규제기구는 “(외환시장에서의) 일방적 거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 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공표했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달러 매도에 나서며 위안화 하락을 저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의 상승을 막기 위해 한국은행이 보유한 달러를 시장에 내다 팔면서 지난달 외환 보유액이 3개월 만에 감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개입에 힘입어 지난 11일 이후 엔화와 위안화는 달러 대비 환율이 각각 147엔에서 146엔대, 7.3위안에서 7.2위안대까지 하락(통화 가치 상승)했으나, 그럼에도 당분간 약세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블룸버그통신은 “중국은 경제 위기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도 조만간 해제될 가능성은 낮다”며 “위안화, 엔화의 약세는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