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앞둔 중년 가정에게 ‘노후 생활비’는 현실 고민이다. 매달 나오던 월급이 끊기는데 통장 잔고가 바닥나진 않을지 걱정하는 것이다. 이럴 땐 은퇴 선배들이 월 생활비로 현재 얼마씩 지출하고 있는지 실제 데이터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29일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2022년)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60세 이상 전국 은퇴 가정의 평균 생활비는 월 170만원이었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는 2만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데, 국내의 그 어떤 조사보다도 표본가구 수가 많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연령대별 생활비 그래프는 계단식 감소세를 보였다. 60대에 226만원이던 월 생활비는 70대엔 162만원으로 줄었고, 여든이 넘으면 월 121만원까지 작아졌다.
황명하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연구위원은 “퇴직하면 현역 시절처럼 소득이 많지 않아 걱정이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만큼 지출도 크게 줄어든다”면서 “은퇴를 전후로 소비 감소 현상이 발생해 50대 현역과 60대 은퇴자의 생활비는 월 431만원에서 226만원으로 48% 급감한다”고 말했다.
황명하 위원 분석에 따르면, 은퇴하고 나면 특히 세금이나 국민연금, 대출이자와 같은 비소비지출 비중이 줄어든다. 황 위원은 “50대 현역 시절의 실지출에서 비소비지출 비중은 32%를 차지하지만 퇴직한 60대 은퇴자의 비소비지출 비중은 전체 생활비의 23%로 줄어든다”면서 “퇴직금으로 대출을 다 갚아버리니 이자 상환 부담이 사라지고 노후 대비를 위한 연금 가입 등도 줄어드는 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퇴직 후 나타나는 소비절벽
조선일보 [왕개미연구소]는 지난 7월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와 함께 ‘대한민국 노후 피라미드’를 심층 조사해 기사를 작성했다. 노후소득 피라미드(아래 그래픽)를 보면, 현역 때 준비를 많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월 소득이 각각 525만원, 101만원으로 격차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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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들의 소득 격차는 노후 소비 패턴도 극과 극으로 만든다. ‘생활비가 충분히 여유있다’고 생각하는 은퇴귀족층의 월 평균 지출은 449만원에 달했다. 40~50대 현역 가정만큼 씀씀이가 크지만, 지출보다 소득(월 525만원)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가정 내 현금 흐름은 흑자 기조다.
그런데 지갑에 여유가 많은 은퇴귀족층도 나이가 들수록 소비가 계단식으로 감소했다. 60대에 563만원에 달했던 월 소비액은 70대가 되면 월 370만원, 80대는 341만원으로 줄었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80대 은퇴자 이모씨는 “다리 힘이 좋지 않으니 해외 여행도 힘들고 비싼 식당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냥 집에서 간단히 밥과 국, 나물만 먹어도 충분하다”면서 “크게 가지고 싶은 것도, 가져야 할 것도 없어 돈 쓸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은퇴귀족 449만원 vs 빈곤층 100만원
한창 돈 벌 때는 누구나 지갑 여는 것이 무서운 줄 모르고 무신경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은퇴하면 들어오는 돈 없이 모아둔 돈에서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체감 지출액이 상대적으로 훨씬 크게 다가온다.
‘노후 자금이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소득 하위 20%인 절대빈곤층의 은퇴 이후 경제 생활은 어떨까. 이 계층의 월 평균 소득은 101만원인데, 대부분 정부가 지원하는 공적 수혜금(기초연금이나 기초생활보장수급금)과 자녀 용돈 등이 재원이다.
분석 결과, 이들의 한 달 평균 생활비는 100만원으로, 은퇴귀족층 평균 지출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보유 자산은 없기 때문에 세금이나 이자 같은 비소비지출은 매우 미미하고, 식비와 주거비 비중이 전체 소비의 절반을 차지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맞춰 살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 난다.
그런데 절대빈곤층도 은퇴귀족층처럼 나이가 들수록 씀씀이가 줄었다. 60대에 월 평균 126만원을 썼던 사람은 70대가 되면 89만원, 80대부터는 82만원 정도만 썼다.
✅건강 무너지면 인생 고행
노후 생활비는 나이가 들수록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퇴직 전과 비교하면 평균적으로 50% 이상 줄어든다. 그런데 노후 생활비 계획을 짤 때, 한 가지 변수가 남아 있다. 바로 의료비다.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제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의료비가 노후 생활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12% 정도다.
하지만 노년에 건강이 무너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거동이 어려워져서 남(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면, 가정 경제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쉽다.
50대 주부 이모씨는 “부모님 병 간호를 먼저 경험한 지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진료비보다 간병비가 더 많이 나오고 돈을 물 쓰듯 써서 나중에 얼마나 썼는지 기록조차 안 된다고 한다”면서 “애들 사교육비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데, 노후 병원비는 언제까지 얼마나 쓰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 더 공포스럽다”고 말했다. 서비스 가격은 일단 한 번 오르면 잘 떨어지지 않는데, 간병비는 최근 5년간 40% 가까이 상승해 큰 부담 요소다.
60대 은퇴자 황모씨는 “퇴직하기 전엔 몰랐는데 모아둔 범위 내에서 돈을 써야 하고 애들한테 짐이 안 되려면 간병비도 비축해야 해서 심적 부담이 커졌다”면서 “은퇴하면 생활비가 감소한다고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싶어서 아내와 상의해 생활비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황명하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위원은 “노후 의료비는 젊었을 때 실손의료보험에 가입해서 위험을 커버할 수 있도록 구조를 짜야 한다”면서 “노후 생활비 중에서 그나마 줄일 수 있는 항목은 주거비인데, 은퇴해서 작은 평수나 외곽으로 이사하면 부담을 덜 수 있다”고 말했다. 황 위원은 이어 “은퇴 이후 건강보험료 부담이 늘어난다는 문제는 사적연금(개인연금, 퇴직연금 등)으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라며 “사적연금 계좌에서 받는 연금액은 현재 시점에선 건강보험료 부과 대상으로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