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거주자들의 엔화예금 잔액은 9월 말 기준 83억8000만 달러로 불어났다. 역대 최대다.
많은 사람 머릿속에 ‘100엔=1000원’은 공식처럼 자리 잡고 있다. 원·엔 환율이 900원대로 내려간 작년 봄부터 엔화 사재기 열풍이 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엔화 가치는 언제 오르는 걸까? ‘엔화 개미’ 투자자들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고 있다. 지난 4일 원·엔 환율은 장중 875원까지 떨어졌다.
환율 전문가인 변정규 미즈호은행 전무에게 엔화의 향방을 물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지금 엔화를 강세로 돌릴 이유가 없다”며 “임금이 오르고 소비 진작이 일어나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는 게 확인된 후에야 방향 전환이 시작될 것이다. 내년 4월 이후”라고 말했다.
-일본 당국이 엔화 약세를 용인하는 것 같다.
“일본으로선 ‘총알’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시장에 개입해도 약발이 먹히지 않는 시점이다. 투자자들은 어차피 일본은행(BOJ)이 올해 말~내년 초 사이에 통화정책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개입을 무서워해야 약발이 먹히는데, 지금 그렇지가 않은 상황이다.”
-무슨 의미인가.
“올 초 엔화가 급격히 강세로 갔었다(작년 10월 달러당 150엔이었던 엔화 가치가 올해 1월 달러당 120엔대로 떨어짐.) 당시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 임기 만료를 앞두고 새 총재가 누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새 총재가 오면 그간의 초(超)저금리와 무제한 국채 매입 등 완화 조치가 정상화될 수 있다고 보고 시장이 앞서나갔다. 하지만 막상 바통을 이어받은 우에다 가즈오 총재가 아베노믹스를 계승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하자, 엔화 가치가 도로 떨어졌다. 일본은 당분간 통화정책 정상화가 어렵다.”
-왜 그런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가 한국·미국 모두 2%대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도 마이너스다. 일본 국채에 대한 투자가 일어나려면 실질금리가 적어도 플러스 영역으로 올라서야 투자 매력이 생기는데 아직은 그게 요원하다. 임금 상승세도 더디다. 지금 일본 물가상승률이 3%대로 높다고는 하지만 이게 유지되려면 소비가 꾸준히 일어나야 한다.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 소비자들은 웬만해선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 결국 절대임금이 올라야 한다.”
-그럼 엔화는 계속 약세에 머무르는 건가?
“내년 4~5월 일본 재계와 노동계의 봄철 임금 협상 시즌인 춘투(春鬪)가 지나고 임금 인상이 확실해진 후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이 부분에서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는 어차피 시한부 정책이다. 언제 정상화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원·달러 환율은 1300원대가 ‘뉴 노멀’이 된 것 같은 분위기인데….
“내년에는 미국의 스탠스(통화정책 기조)가 바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달러가 약세로 갈 것으로 본다. 미국은 ‘상처가 많은 챔피언’이다. 상처를 치유하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가는 상황이다. 막대한 국채를 찍어내고 있고, 지금 같은 고금리에선 많은 국채 이자를 내야 한다. 게다가 어떤 나라도 ‘신용등급’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2011년엔 국제 신용평가사 S&P가, 올 8월엔 피치가 미국 신용등급을 최고등급에서 한 계단 내렸다. 내년에 미국 국가부채 문제가 더 심각해져 무디스까지 내리면 달러 약세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처럼 1100원대가 될까?
“2000년대 이후 원·달러 환율 중간값이 1130원이다. 이보다는 50~70원 높은 수준에서 형성될 것으로 본다. 코로나 이전까지 미·중 간 환율전쟁이 크게 일어났지만, 코로나 이후 논리가 바뀌어 자국의 강한 통화가치를 용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의 무역적자와 함께 부채 문제가 크게 거론된다면, 다시금 환율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달러화 약세 가능성을 예상하는 이유다.”
☞변정규 전무는
JP모건 서울, 홍콩, 도쿄, 싱가포르 지점을 거쳐 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 딜링룸 총괄 헤드와 SC제일은행 딜링룸 이사 등을 지냈다. 2014년부터 미즈호은행 서울지점 자금실 그룹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