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내내 부진했던 반도체주(株)가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국내 대표 반도체 종목 50개로 구성된 KRX 반도체 지수는 이달 1~14일 12.1% 올라 전체 28개 KRX 지수 중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6~7%대인 코스피와 코스닥 상승률을 훌쩍 뛰어넘는다.

10월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시장 예상을 밑돌면서 글로벌 증시가 환호한 15일에도 반도체 업종의 상승세는 두드러졌다. 이날 3% 넘게 오른 SK하이닉스는 13만4200원을 터치하며 신고가를 갈아치웠다. 삼성전자도 1.9%오른 7만2200원에 거래를 마감해 5거래일 연속 ‘7만전자(주가가 7만원대인 삼성전자)’ 타이틀을 지켜냈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 주가도 대부분 강세였다. 이날 마이크로컨텍솔과 에이직랜드가 상한가를 기록했고, 주성엔지니어링(7.4%), 한미반도체(4.7%), HPSP(4.2%) 등도 크게 올랐다.

그래픽=박상훈

◇‘반도체 러브콜’ 외국인

이런 반도체주 상승 배경엔 ‘돌아온 외국인’이 있다. 지난달엔 반도체주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던 외국인들이 최근 장바구니에 반도체주를 쓸어 담고 있다. 삼성전자는 원래 공매도 영향이 적은 주식이기도 하지만, 공매도 금지 후 출렁임이 심해진 이차전자주와 달리 삼성전자는 외국인의 러브콜을 받는 것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공매도가 전면 금지된 지난 6일 이후 14일까지 외국인이 국내 증시에서 가장 많이 산 종목은 삼성전자로 약 5060억원어치를 순매수(매수가 매도보다 많은 것)한 것으로 집계됐다. SK하이닉스(2890억원)는 해당 기간 하이브(4070억원)에 이어 외국인 순매수 3위를 차지했다. 지난달 외국인이 삼성전자를 5760억원가량 순매도했던 것과 비교하면 반도체에 대한 외국인들의 투자 심리가 바뀐 걸 알 수 있다. SK하이닉스 순매수액도 1260억원이었던 지난달보다 크게 늘었다.

그래픽=박상훈

◇반도체 혹한기 지나가나

외국인은 반도체 업황이 턴어라운드한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타나자 주가 상승에 베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하나는 지난 2년여간 하락세였던 반도체 가격이 반등하기 시작한 점이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과 PC 시장이 살아나면서 지난달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은 2021년 7월 이후 처음 상승세로 돌아섰다.

그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선 삼성전자 등 주요 업체의 감산 등에 힘입어 올 4분기부터 회복 국면에 접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최근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와 AI(인공지능) 반도체 등 여타 부문에서도 긍정적 소식이 쏟아졌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의 10월 매출이 8개월 만에 증가세로 돌아선 게 대표적이다. TSMC는 지난달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5.7% 증가한 2432억대만달러(약 10조원)를 달성했다.

챗GPT 등 생성형 AI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엔비디아가 출력 속도를 2배 높인 신형 칩을 지난 13일 공개한 것도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고 있다. 메모리 시장 회복에 AI 반도체 수요까지 겹치면 이들의 실적 반등 속도는 훨씬 빨라질 것이란 전망이다.

◇연말 ‘8만전자’ 도약 시동 걸까

증권가는 올 연말을 반도체 업황 회복의 분기점으로 본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메모리 반도체 출하량이 점차 증가하는 가운데 D램과 낸드 가격이 동시에 상승하고 있다”며 “4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실적 개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가는 삼성전자의 4분기 영업이익을 전년 동기 대비 19%가량 줄어든 3조4842억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여전한 역성장이지만 감소 폭은 3분기(77%)에 비해 크게 좁혀진다고 보는 것이다. SK하이닉스도 4분기에 적자 폭을 크게 줄인 뒤, 내년 1분기에 3500억원대의 흑자 전환에 성공할 것으로 추정했다.

다만 글로벌 경기 침체 가능성이 변수가 될 수 있다. 한국기업평가는 “중국의 경제 상황이 보다 급격한 침체 국면에 진입한다면 반도체 업황 개선 예상 시기가 내년 상반기로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