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일본 증시가 3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일본 증시의 최대 큰손인 일본은행(BOJ)의 투자 성적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채만 잔뜩 들고 있던 일본은행은 지난 2010년 12월 시라카와(白川) 전 총재 시절에 본격적인 주식 투자에 나섰다. 그해 10월에 금융정책결정회의가 열렸는데, 경기 회복을 위해 ‘포괄적인 금융완화정책(중앙은행이 위험자산 직접 매수)’을 시행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그때부터 일본은행은 매년 일본의 대표 지수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ETF란, 특정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간접투자상품으로, 개별 주식처럼 거래소에서 실시간 거래된다.
신탁은행들이 실무를 맡고 있는데, 일본은행 계좌로 노무라·다이와 등 대형 자산운용사의 ETF를 골고루 매수한다. 초기엔 연 4500억~1조엔 규모로 매수했지만 점차 규모가 커졌고, 2020년 코로나 위기로 주가가 급락했을 땐 7조엔 어치 통크게 매수해 증시 구원투수를 자처했다.
✅BOJ, 매년 1조엔 챙기는 배당부자
지난 2010년부터 13년 동안 진행된 일본은행의 적립식 투자 성과는 어떨까. 13년 동안 일본은행은 ETF를 계속 사기만 했지, 판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 지난 6월 말 기준 일본은행의 ETF 보유 잔고는 60조엔(약 524조원)에 달했다. 전세계 최대 기관 투자자인 일본 공적연금(GPIF)의 일본 주식 보유액(50조엔)도 훌쩍 뛰어 넘는다.
ETF 투자에 따른 평가 이익은 24조엔(209조5900억원)으로, 전세계 내로라하는 자산운용사 성과다. 일본은행이 처음 ETF를 투자한 당시, 닛케이평균이 1만선 근처였고 지금은 3만3000선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한국은 국민연금이 개별 회사 지분을 많이 보유해 ‘연금 사회주의’ 지적이 나오는데, 일본은 대주주가 일본은행인 경우가 많다. 가령 한국에서도 ‘유니클로’로 잘 알려져 있는 일본 패스트리테일링은 최대주주가 일본은행(21.9%)이다. 창업자인 야나이 다다시 회장 지분(19.5%)보다 많다. 패스트리테일링을 비롯, 일본은행이 직·간접적으로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는 72곳에 달한다. 도쿄일렉트론, 화낙, 야마하, 키코만 등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즐비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올해 ETF 분배금(배당)으로만 1조1000억엔(약 9조6100억원)을 받았고, 정부의 고배당 유도 정책을 등에 업고 내년에 챙길 분배금은 1조2400억엔이 넘을 전망이다.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올해 받은 주식 배당금이 57억달러(한화 7조4400억원)였는데, 일본은행이 손에 쥐는 배당금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WSJ 보도).
✅BOJ의 ETF 매수에 무슨 일이
일본은행이 자국 ETF를 매수해서 보유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우량주 위주의 ETF라고 해도 시장 상황에 따라서는 대규모 손실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ETF를 시장에서 직접 매수해 보유하는 곳은 전세계 중앙은행 중에 일본은행이 유일하다.
그런데 13년 동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일본은행의 ETF 매수 행진에 최근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2023회계연도 상반기(4~9월)에 ETF 매수를 전혀 진행하지 않았다. 반기 기준으로 ETF를 전혀 매수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블룸버그는 “지난 2021년부터 일본은행은 주가지수(TOPIX)가 오전에 2% 이상 하락하는 날에 한정해서 ETF를 매수하고 있다”면서 “올 상반기엔 증시 환경이 좋아서 2% 이상 하락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고 이에 따라 일본은행의 ETF 매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투자서적 <1%를 읽는 힘>의 저자 메르씨는 “일본은행의 ETF 잔고는 총자산(735조엔) 대비 8% 정도로 비중이 아주 높지는 않은데 증시 호황장에서 ETF를 더 사면 과열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다”면서 “지금은 비중을 더 이상 늘리지 않고 유지하다가 주가가 폭락하는 시기 등에 추가 매수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것” 의견도
ETF를 대량 보유하면서 ‘주식 공룡’이 된 일본은행을 둘러싸고, 일본 현지에선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금융 완화 기조에서 벗어나 정상화 국면이 되었을 때, 만기가 없는 ETF 잔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논쟁의 중심이다.
국채는 만기가 있지만 ETF는 만기가 없다. 만기가 없다고 해서 계속 보유하다가 주가 급락으로 손실이 커져 일본은행이 충당금을 쌓아야 하면 국고로 납부할 금액이 줄고, 결국 국민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은행은 ETF 처분과 관련해 구체적인 전략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지만, 민간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기우치다카히데(木内登英) 노무라종합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NHK 인터뷰에서 “거액의 ETF를 보유하는 것은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은행이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위험한 ETF를 계속 보유할 이유가 없으며, 100년이 걸리더라도 시장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처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닛세이기초연구소의 이데신고(井出真吾) 최고주식전략가는 “정책 목적에서 대량의 주식을 보유한 중앙은행은 전세계에서 일본은행밖에 없다”면서 “외부기관에 ETF를 이관해서 배당금 수입으로 성장 투자를 촉진하거나 혹은 국민연금 신규 가입자(혹은 희망자)에게 무상 배부해서 연금과 세트로 수령하게 하는 방법 등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10년째 ‘NO金'
일본은행은 지난 13년 동안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적립식 ETF 투자를 이어 왔다. 이제 우리가 궁금한 건, 한국은행의 자금 운용 현황이다.
한국은행은 다른 주요국 중앙은행들과 비슷하게 채권과 외화예금 위주로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금(金) 투자만은 예외다. 올해 중국 인민은행이 1978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게 되는 등 전세계 중앙은행들은 금 매입을 늘리고 있다. 하지만 한은은 10년째 금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남들은 전부 금을 쌓고 있는데 한은은 외면하다 보니, 한국은행의 금 보유 순위는 하락세다. 지난 6월 기준 세계 36위인데, 10년 전(32위)보다 순위가 낮아졌고, 국가 부도 상태인 베네수엘라(25위)보다도 순위가 처진다. 참고로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 규모는 지난 9월 기준으로 전세계 9위다.
경제 분석 전문가인 메르씨는 “한국은행은 금융위기 이후 달러화 위상이 떨어지자 금을 대량으로 샀는데 이후 금값이 내려가자 국회에 불려 다니며 치욕을 당했다”면서 “중앙은행의 자산 운용을 국회가 감시하고 질의할 수 있지만, 전문적이지 않은 과다한 개입이 한국을 베네수엘라보다 금 보유가 적은 나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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