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국내 행동주의 펀드들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확대, 이사 선임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행동주의 펀드는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기업가치 상승을 노린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행동주의 펀드 활동으로 주주가치 확대가 예상되는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ETF(상장지수펀드)를 이달 중순 출시한다고 5일 밝혔다. 트러스톤운용 관계자는 “지배구조 문제로 저평가된 가치주를 담은 ETF는 기존에도 있었지만, 주주 활동 기업에 초점을 맞춘 행동주의 ETF는 국내 최초”라고 밝혔다. 이와 유사한 미국의 대표 행동주의 ETF ‘리더셰어즈 액티비스트 리더스(티커명 ACTV)’는 최근 5년 수익률이 29%에 달한다.
◇광폭 행보 행동주의 펀드
최근 활발한 토종 행동주의 펀드는 KCGI자산운용(옛 메리츠자산운용)이다. 사명 변경 후 지난 9월 처음으로 내놓은 공모펀드가 ‘ESG동반성장펀드’였을 정도로 행동주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달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등기이사 사임 등 지배구조 개선을 이끌어 냈다. 추가로 자사주 전량 소각도 요구하는 중이다.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는 최근 6개월 새 8%가량 올랐다.
코람코자산신탁은 업계 최초로 국내 상장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를 상대로 한 행동주의 활동을 예고했다. 지난달 27일, 자신들이 지분을 보유한 4개 리츠(신한알파리츠·이리츠코크렙·이지스레지던스리츠·이지스밸류플러스리츠)의 주식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경영 참여’로 변경했다. 리츠 상장사의 유상증자나 추가 자산 편입 등이 과도하다는 주주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경영 참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어서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리츠 업계는 금리 인상의 직격탄을 맞아 연초 대비 주가가 20% 안팎 급락한 상황이다.
국내 행동주의 펀드 활동은 2018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이후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경영 참여형 사모펀드는 2018년 580개에서 작년 3분기엔 1094개로 2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기업의 경영에도 깊이 관여하는 양상이다. 지난해 트러스톤운용은 태광산업이 계열사 흥국생명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해 무산시켰다. HL홀딩스는 주요 주주인 VIP자산운용의 요구를 받아들여 3년간 200억원에 달하는 자사주 분할 매입·소각 계획을 지난 8일 발표했다. VIP운용이 2년 넘게 행동주의 공세를 벌인 아세아시멘트도 지난 8일, 향후 2년간 순이익의 40% 이상을 주주들에게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행동주의 타깃 된 美 디즈니
해외에선 디즈니가 행동주의 펀드의 공세를 받고 있다. 넬슨 펠츠가 이끄는 트라이언 펀드가 지난달 30일 “이사진 교체를 요구하겠다”며 주총에서 표 대결을 예고한 것이다. 이사회 자리 2개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인 것으로 알려졌다. 트라이언 펀드는 올해 1월에도 이사회 자리를 요구했지만 디즈니가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자 일단 물러섰다. 그러나 좀처럼 디즈니 경영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주총 표 대결 예고에 향후 배당 재개 기대감 등이 겹쳐 디즈니 주가는 최근 한 달 새 10%가량 뛰었다.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인베스트는 지난달 29일 에너지기업 필립스66의 지분 10억달러어치를 인수한 후 이사회 자리 2개를 요구했다. 이 같은 소식이 보도되자 주가가 하루 새 4% 넘게 올랐다. 클라우드 기반의 소프트업체 트윌리오도 행동주의 투자자 앤슨펀드가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 28일 3% 넘게 주가가 뛰었다. 미국 투자은행 라자드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캠페인)은 235건으로 전년 대비 36% 증가했다. 금리 인상 등으로 기업들의 구조적 문제가 부각되자 행동주의 펀드가 이를 기회 삼아 활동을 늘리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행동주의 펀드들이 단기적인 주가 상승에 집중하기 때문에 장기 투자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ESG기준원 박정민 연구원은 “최근 급성장한 주주행동주의 흐름이 자본시장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공시 측면의 제도 개선 노력과 더불어 시장 참여자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이 요구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