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시장은 늘 기복이 있지만 올해 코스피는 너무 무기력하네요. 남들 다 오를 때 못 오르는데, 이러다 남들 빠질 때 같이 빠질까 두렵습니다.”(20년차 개미 투자자 A씨)

올해 한국 증시 등락률이 주요국 중 꼴찌를 기록한 가운데, 개인 투자자들의 고민과 고통이 커지고 있다. 2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초 이후 24일까지 한국 코스피지수는 7% 하락해 비교 대상인 23개 주요국 지수 중 최하위였다. 올해 수익률 1위(8.2%)인 일본 닛케이평균과 비교하면, 증시 체감 온도는 최강 영하권이다. 미국에선 500개 대표기업을 모은 S&P500 지수가 사흘 연속 랠리를 이어가더니 지난 24일(현지시각) 장중 4900선을 사상 처음으로 찍었고(종가는 4868), 독일 닥스30지수 역시 같은 날 장중 1만6900선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쉽지 않은 K증시에 질린 한국 투자자들은 미국·일본 등 선진국 증시로 달려가고 있다. 25일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한국인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순매수(매수에서 매도를 뺀 것) 금액은 6500억원에 달한다.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등의 종목이 순매수 상위 리스트에 올라 있다. 50대 회사원 박모씨는 “2년이나 들고 있어도 마이너스인 한국 주식을 과감히 팔고 미국 주식으로 옮겼는데 이번에 손실을 전부 만회했다”면서 “장기 투자자는 다 빠져나가고 단타꾼들만 남는 한국 증시에서 돈 벌긴 매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그런데 이렇게 돈이 점점 마르고 있는 한국 증시에서 탈출하지 않고 오히려 100억원이 넘는 통큰 주식 베팅도 나오고 있어 이목을 끈다.

인기 걸그룹 ‘블랙핑크’를 키운 와이지엔터의 양현석 총괄 프로듀서는 지난 22~24일 사흘 동안 200억원 어치 주식을 매수했다. 평균 매수 단가는 약 4만3300원. 이번 매수로 종전 16.8%였던 양 총괄의 지분율은 19.3%로 늘어났다.

와이지엔터는 작년 5월에만 해도 주당 9만7000원을 찍는 등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회사 핵심 수익원이었던 ‘블랙핑크’의 개별 멤버 재계약이 무산되면서 주가가 내림세로 돌아섰다. 매출 공백을 우려한 증권사들은 와이지엔터 목표가를 20~30% 하향 조정하는 등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결국 지난 18일엔 주가가 4만100원까지 빠지는 등 작년 최고가 대비 현재 주가는 반토막난 상황이다.

최근 1년 동안의 와이지엔터 주가 추이. 와이지엔터는 다음 달 신인 걸그룹인 ‘베이비몬스터’ 신곡을 내놓는 등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통상 오너의 주식 매입은 향후 회사 실적이 좋아질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회사의 실제 가치보다 주가가 저평가되었다고 판단될 때 주식을 대량으로 사기 때문이다. 다만 양현석 총괄의 경우엔 주식 매수 실탄이 전액 빚투(빚내서 투자)라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23일 공시에 따르면, 양현석 총괄은 와이지엔터 주식을 담보로 잡고 삼성증권에서 3개월 동안 200억원을 빌렸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투자할 때 돈을 빌려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약점으로 잡혀서 공격 당하기 쉽다”면서 “돈까지 빌려 투자했는데 주식이 반등하지 못하고 하락하면 반대매매로 이어지고 주가 변동성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작년 11월 걸그룹 블랙핑크가 영국 런던 버킹엄궁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 참석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제, 지수, 제니, 리사./연합

양현석 총괄에 뒤이은 통큰 한국 주식 베팅은 한국금융지주 김남구 회장의 장남인 93년생 김동윤씨다. 동윤씨는 이달(24일까지)에만 약 110억원(19만8000주) 어치 주식을 사들였다. 지난 2019년 한국투자증권에 공채 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지점 영업, 투자은행(IB) 등 실무 경험을 쌓은 뒤, 지금은 경영전략실 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 10일 1만주로 시작된 동윤씨의 주식 매수는 비정기적이지만 하루에 1만~3만주씩 이뤄지고 있다. 목돈을 쥐고 있어도 한방에 사지 않고, 마치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듯 차곡차곡 사서 모으는 중이다. 매수 자금 출처는 아직 공시에 나오지 않았지만, 증권가에선 증여 자금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월 적립식 주식 매수로 0.09%에 불과했던 동윤씨 지분율은 25일 기준 0.45%까지 높아졌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증권업계 관계자는 “한국금융지주는 카카오뱅크 지분 가치 하락에 더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악재까지 겹치면서 주가 흐름이 지지부진하다”면서 “현재 주가 수준이 바닥이라는 판단에서 승계 목적의 저점 매수가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윤씨의 폭풍 주식 매수를 둘러싸고, 부친인 김남구 회장(20.7% 보유한 최대주주)이 폭락장 저가 매수의 귀재였다는 과거 사실도 재조명받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 2020년 3월 코로나 폭락장에서 자사주 26만3000주(약 86억원)를 매수했는데, 당시 매입가는 주당 3만원 초반으로 역대 최저가 수준이었다. 그의 자사주 매수는 11년 만에 처음이었는데, 직전 매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2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