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차 직장인 윤모(29)씨는 작년 12월 중국 여행을 가서 4박 일정에 120만원을 쓰고 왔다. 서울 원룸에서 자취하는 윤씨의 한 달 생활비 9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돈이다. 윤씨는 평소에는 돈을 아끼기 위해 외식도 잘 하지 않고, 여가 시간엔 집에서 유튜브 영상 등을 보며 지낸다. 그런데 중국 여행에선 고급 레스토랑과 마사지숍 등을 다녔고, 종업원에겐 팁(봉사료)도 턱턱 냈다. 윤씨는 “몇 번 없는 여행 기회고 이왕 간 것 재밌게 놀다 오자란 생각에 해외에선 돈을 팍팍 쓰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여행 여론조사 전문 기관 컨슈머인사이트가 발표한 ‘월간 국내·해외여행 동향 보고’에 따르면, 국내 여행 평균 기간과 1인당 경비는 각각 2박과 23만8000원으로 집계됐다. 반면 해외여행은 6박과 183만8000원으로 조사됐다. 여행 일수 차이를 고려해 3박 4일로 환산해 계산하면, 해외여행에서 쓰는 돈이 3.4배 많은 것이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은 696만명으로 전체 일본 관광객의 28%를 차지하기도 했다. 일본 관광객 수 1위를 한국이 차지했다.
팍팍한 경제 상황에 소비자들이 국내에선 지갑을 닫고 있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면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2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소비는 지난해 1~3분기에 각각 1%, 0.6%, 0.9%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국내 거주자의 해외 소비를 보면 1분기에 5.9% 늘어난 데 이어, 2분기(13%), 3분기(19%)엔 두 자릿수 증가율로 가파르게 늘었다. 3분기만 보면, 해외 소비 증가폭은 1조 2680억원으로 국내 소비 증가폭(2조 3674억원)의 절반이 넘는다.
해외 소비가 늘어나는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니다. 국민 소득 등이 늘어나면서 해외 소비가 함께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국내 항공사나 해외여행 연관 산업 등이 수혜를 볼 수 있기도 하다.
문제는 고금리·고물가 여파로 내수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내수의 큰 축을 담당하는 민간 소비의 침체가 심각하다. 2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민간 소비는 전 분기보다 0.2%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한은은 재화 소비가 크게 감소한 가운데 해외 소비가 늘어난 영향으로 분석했다. 소비가 국내 생산과 고용에 보탬이 되는 국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성장률도 낮은 수준이다. 이날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성장률은 1.4%를 기록했다. 민간 소비와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면서 전년에 기록했던 2.6% 성장의 거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특히 지난해 민간 소비 증가율은 1.8%에 그쳤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4.8%)을 빼면 2013년(1.7%) 이후 1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신승철 한은 경제통계국장은 “일반적으로 민간 소비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50% 수준으로, 성장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나와주는 것이 좋다”며 “최근 흐름을 보면 성장률 자체가 낮아진 데다 민간 소비 또한 성장률을 하회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과거 고성장 시기와 숫자를 비교하면 상당히 낮다”고 했다.
앞으로도 소비 등 내수 부진은 우리 경제의 성장을 낮추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신 국장은 “내수 부진이 주요한 하방 요인으로 작용하는 한편, 수출이 개선돼 이런 부분을 상쇄할 것으로 보인다”며 “전체적으로는 2%대 초반 성장률 흐름을 보일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