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2200억엔(약 10조8444억원). 전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이 지난해 일본 증시에 투입한 신규 자금 규모다. 2022년 투자 금액의 14배에 해당한다.
벨린다 보아 블랙록 아시아태평양 운용책임은 최근 일본 TBS뉴스와의 인터뷰에서 “30년 동안의 잠(디플레이션)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일본은 지금 글로벌 증시에서 가장 핫한 투자처”라고 말했다.
일본 현지 증권가에서 ‘속도 위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 증시 상승세가 거침없다. 13일 일본 도쿄 증시에서 닛케이평균이 3% 넘게 급등하면서 장중 한때 3만8000엔선을 뚫었다. 3만8000엔은 지난 1990년 1월 버블경제 붕괴 이후 34년여 만에 찍은 최고치다. 닛케이평균은 지난 8일부터 이날까지 3거래일 연속 34년 최고치 경신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닛케이평균 종가는 전날보다 2.9% 오른 3만7963.97엔.
연초 3만3000엔선에서 거래를 시작한 닛케이평균은 외국인과 개인 투자자들의 ‘사자’가 늘어나면서 3만6000엔선까지 급상승했다. 이후 상승 탄력이 약해지는 듯 했지만, 미국 증시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일본 기업들이 호실적을 발표하면서 재차 상승 모드로 돌아섰다.
이날 닛케이평균이 1000엔 이상 급등한 것은 반도체 업종 상승세의 힘이 컸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글로벌 증시의 메가트렌드는 엔비디아로 대표되는 AI(인공지능)”라면서 “AI 서비스를 구현하려면 반도체가 필요한데, 일본 증시에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등 경쟁력 높은 반도체 밸류체인 기업들이 촘촘하게 포진돼 있고 이들 기업이 일본 증시 상승을 견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날은 반도체 장비회사인 도쿄일렉트론의 주가 상승세가 돋보인 하루였다. 닛케이평균은 가격 가중평균 방식으로 산출되기 때문에 시총이 낮아도 주가가 높으면 지수 내 비중이 커진다. 도쿄일렉트론은 닛케이평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 정도로 큰데, 이날 13.3% 상승한 3만3720엔에 마감했다(비중이 가장 큰 종목은 유니클로를 만드는 패스트리테일링). 반도체 장비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향후 실적 전망을 대폭 상향 조정한 것이 호재였다.
이날 금융청(한국의 금융위원회)이 대형 손해보험사 4곳에 이른바 ‘정책 보유주 매각’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보험주 주가가 급등했다. 정책 보유주는 순수한 투자 목적이 아니라, 거래처 등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보유하는 주식을 말한다. 기업이 사실상 돈을 놀리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 보유주는 기업의 수익성 지표인 자기자본이익률(ROE) 악화 요인으로 꼽힌다. 정책 보유주를 매각해서 여유 자금이 생기면, 배당 등과 같은 주주 환원에 활용할 수 있다.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도쿄카이죠(東京海上)홀딩스는 도요타자동차, 혼다, 스즈키 등의 주식을 갖고 있다. 이렇게 4개 손보사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 규모는 6조5000억엔(약 58조원)에 달한다.
이제 전세계 투자자들의 관심은 닛케이평균이 역사적 최고점을 깰 것인지에 쏠린다. 닛케이평균의 역사상 최고점은 지난 1989년 12월의 3만8915엔(종가 기준)이다. 당시 일본 증시는 전세계 시가총액의 45%를 점했을 정도로 초활황이었다. 앞으로 2.5% 정도만 더 오르면 일본 증시는 증시 기록을 다시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