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정부가 출시할 ‘개인 투자용 국채’의 단독 판매사 자리를 놓고 은행, 증권사 등 금융권의 경쟁이 치열하다. 10여 개 주요 증권사·은행이 판매사로 선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냈다. 기획재정부는 14일 업체별 프레젠테이션을 받았고, 이달 중 판매대행사 1곳을 선정할 예정이다.
단독 판매사가 벌어들일 연간 수수료는 20억원 남짓으로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은 고객 저변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특히 절세 상품과 장기 국채 투자에 관심이 큰 ‘큰손’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큰손들이 결국 다양한 채권에 관심을 갖게 되고 회사채나 다른 국공채 등으로 투자를 확대할 것이란 계산도 있다. KB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인 한국 부자는 지난해 45만6000여 명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절세에 관심 많은 ‘큰손’ 고객 잡아라
개인 투자용 국채는 10년, 20년 만기 상품으로 올 상반기 출시된다. 연간 최소 10만원부터 1억원까지 투자할 수 있다. 국채 투자 문턱을 이전보다 확 낮춘 게 특징이다.
만기까지 보유하면 가산금리에 연복리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매입액 2억원까지는 이자소득의 14% 분리과세 혜택도 받을 수 있다. 표면금리는 4% 전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도환매는 매입 1년 뒤부터 허용하되, 시장에서 매매할 수는 없게 막았다.
업계에선 개인 국채가 사실상 고액 자산가를 겨냥한 상품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장기간 돈을 묶어둬야 하는 데다, 금리가 그리 높지 않아 일반 대중보다는 절세 효과를 노리는 고액 자산가들에게 체감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소득세와 지방세 최고 세율(49.5%)을 적용받는 자산가가 10년물 일반 국채와 신규 개인 투자용 국채를 만기까지 가져갈 경우, 세후 수익률은 14.1% 대 37.4%로 약 2.7배 차이가 난다. 그렇다 보니 고액 자산가를 잡기 위한 금융권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고금리 ‘이자 장사’로 지탄받고 있는 은행권은 국채 수수료 같은 ‘비이자 수익’ 확대가 절실해 더 적극적이다. 기재부는 일단 단일 창구로 개인 국채를 판매한 뒤 차츰 복수로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금융권 땅따먹기 싸움
그런데 은행권의 참전을 두고 뒷말이 나오고 있다. 애초 기재부는 채권 판매가 본업인 증권사 중 1곳을 정하기로 했다가 유권해석을 통해 국고채 전문 딜러 자격이 있는 은행들로 입찰 대상 범위를 늘려줬다. 은행권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KB국민·하나·NH농협·기업은행 등 4곳이 뒤늦게 경쟁에 뛰어들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고객들에게 막대한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을 초래한 은행권이 불완전 판매 사태가 수습되기도 전에 국채 판매에 손을 들고 나서는 게 말이 되느냐”며 “가입자들에게 위험투자상품 가입을 권유하는 행태가 반복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다른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키코(외환파생상품), 라임 펀드, 독일 국채금리 연계 DLF(파생결합펀드), ELS 등 은행 특성에 맞지 않는 상품 판매는 항상 ‘화’를 불러왔다”며 “국채 판매는 채권을 본업으로 다루는 증권사가 해야 맞다”고 했다.
그러나 은행권은 고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광범위한 고객층과 전국적 점포를 보유한 은행이 맡아야 국민들이 가장 편리할 것”이라며 “은행은 이미 청년희망적금, 재형저축, 디딤돌대출 등과 같은 정부 국책 사업 경험도 풍부하다”고 말했다.
◇21년 전 먼저 도입한 일본은?
일본은 2003년부터 개인 전용 국채 판매를 시작했다. 당시 지점이 많은 우체국에만 판매대행권을 줬다가 2007년, 전체 금융기관으로 대행기관을 확대했다. 그 결과 2003년 2조엔이었던 개인 투자용 국채 규모가 2008년 3조8000억엔으로 성장했다.
현재 시장의 승자는 증권사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증권업계 판매량이 은행 대비 1.95배 많고, 판매 순위 상위 1~5위 중 은행은 단 1곳뿐이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채권을 비롯한 원스톱 장기 자산관리에 증권사가 훨씬 유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