辰巳天井(다츠미텐죠).
요즘 일본 증권가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 중 하나다. 다츠미텐죠란, 용의 해(辰年·진년)과 뱀의 해(巳年·사년)에 주가가 천장을 뚫고 상승한다는 일본판 증시 용어다.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12간지로 살펴봤을 때 일본 증시 역대 상승률은 용의 해가 28%로 가장 높았다.
용의 해인 올해, 일본 증시는 ‘다츠미텐죠’ 속설이 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이다. 일본 증시는 올해만 16% 상승해 세계 주요국 중 상승률 1위다. 지난 16일엔 대표 지수인 닛케이평균이 3만8487에 마감하면서 지난 1989년 12월 버블경제 당시 최고점(3만8915엔)에 바짝 다가섰다. 현지에선 “일본 증시가 깜깜한 터널에서 빠져나와 거대한 상승장의 전야(前夜)를 맞이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 증시에서 가장 왕성한 매수세를 보이는 투자 주체는 외국인이다. 작년 4월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이 일본을 방문해 일본주 투자 비중을 늘릴 것이라고 밝힌 이후, 매수 모드에 발동이 걸렸다(아래 그래프 참고).
올해도 외국인이 일본 증시 상승세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 1월 일본 증시에 유입된 외국인 순매수(매수에서 매도를 뺀 것) 자금은 2조693억엔(약 18조4000억원)에 달했다. 도쿄증권거래소에 관련 통계가 남아 있는 1982년 이후 7번째로 많은 액수다.
엔저(円低) 효과를 등에 업은 일본 수출 기업들의 호실적, 일본은행(BOJ)의 완화적 통화 정책 유지 기대감, 전세계에 불어닥친 탈(脫)중국 기조, 평생 비과세 금융상품(신NISA) 출시 등 여러 호재들이 겹친 결과다.
일본 언론들은 지난 2013년 아베 정권 시절부터 시작된 기업 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 개혁이 11년 만에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고 내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도쿄증권거래소가 주도한 증시 체질 개선 노력이 주목을 끌고 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 2022년 4월 상장기업들의 성장성·유동성을 높여 주식시장 활성화를 꾀하기 위해 상장기업 유지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상장했으니 끝’이란 생각에 기업 가치 향상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좀비 기업’들이 타깃이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에도 거래는 거의 되지 않으면서 ‘상장사’라는 껍데기만 유지하고 덩치는 왜소한 ‘무늬만 상장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거래소그룹 IR부 와가츠마아이라(我妻アイラ)씨는 지난 16일 전화 인터뷰에서 “일본 증시는 원래 1부, 2부, 마자스, 자스닥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2년 전에 프라임(글로벌기업), 스탠다드(중견기업), 그로스(신흥기업) 등 3개 시장 구조로 재편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상장유지 기준이 대폭 강화됐는데 2025년 3월부터 기준 미달 기업들은 상장폐지된다”고 말했다. 만약 해당 기업이 스탠다드나 그로스 시장의 기준을 충족한다면, 기업이 스스로 선택해서 다른 시장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고 와가츠마씨는 덧붙였다,
일본 증시의 최상위 부문인 프라임(글로벌 기업)은 도쿄증권거래소 표현을 그대로 옮겨오면 ‘글로벌 투자자들과 건설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업’이 대상이다. 프라임 시장에서 거래되면,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고 전세계 투자 기관에서 폭넓은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은행 융자를 받을 때에도 유리하고, 기업 신용등급을 산정할 때도 플러스 요인이 된다.
프라임 시장은 장점이 많은 대신, 상장유지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다. 주주 수 800명 이상, 유통주식 수 2만단위 이상, 유통주식 시가총액 100억엔(약 889억원) 이상, 유통주식비율 35% 이상, 하루 평균매매대금 2000만엔(약 1억8000만원) 등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
이달 16일 기준 도쿄거래소에는 총 3925개 기업들이 상장돼 있다. 이 중 프라임 시장에는 1655개 기업들이 속해 있다. 상장 문턱도 높지만 유지 기준도 까다롭기 때문에 연기금 등 해외 큰손들의 신뢰도가 높다고 한다. 와가츠마씨는 “처음 상장유지 기준이 나왔을 땐 ‘강등 예비군’이 많았지만 기업 가치 개선 노력을 하면서 지금은 358곳 정도로 줄었다”면서 “내년 3월까지 아직 유예 기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기업들이 기준을 충족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코스피는 어떤 상황일까.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현재 코스피에 상장되어 거래되는 종목은 총 839개다. 대장주는 삼성전자인데 시가총액이 435조원에 육박한다. 그런데 삼성전자와 똑같은 리그에 속하면서 시가총액이 1000억원도 안 되는 꼬마 종목들은 279개나 된다.
다음은 유통주식비율을 살펴 보자. 일본에서 ‘프라임’ 상장사 신분을 유지하려면, 유통주식비율이 35% 이상이어야 한다. 코스피에는 유통주식비율이 10%도 안 되는 기업들도 있다. 가령 MLB와 디스커버리 등 패션 브랜드를 보유한 F&F홀딩스는 최대주주인 김창수 대표가 전체 지분의 92%를 보유하고 있다. 이남우 기업거버넌스포람 회장은 “유동성이 없다면 상장의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최대주주 지분율이 낮더라도 자사주를 많이 보유해서 실제 유통주식비율이 낮은 상장사들도 적지 않다. 트러스톤자산운용(지분 5.8%)의 공격을 받고 있는 태광산업은 최대주주 이호진 일가와 자사주 물량을 합치면 지분율이 79%에 달한다.
한편, 일본 프라임 시장의 상장유지 조건 중에 시가총액과 유통주식비율만 코스피에 적용했을 때, 시가총액 900억 기준에 미달인 기업은 245곳, 유통주식비율 35% 이하인 기업은 180곳에 달했다. 전체 코스피 종목의 절반은 일본 프라임 기준을 도입하면 리그 탈락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