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도리 지칩니다. 남편은 언제 퇴직할지 모르고 부부 노후 준비도 시원찮은데, 애들은 부모한테만 의지하네요.” “시어머니는 지금 제 나이(56세)에 육아가 끝나 노후를 즐기셨는데, 애들이 집을 안 떠나요. 정말 가슴이 답답합니다.” “다 큰 자식 밥, 빨래, 청소를 언제까지 해주면서 살아야 하나요. 친구들처럼 부모가 집을 마련해줘야 독립하겠다고 하네요.”

성인 자녀의 경제적 독립이 인생 후반전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고물가·고령화 시대일수록 노후는 더 빈틈없이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홀로서기를 미루는 자녀 때문에 장밋빛 인생 말년 계획이 틀어졌다며 속상해 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예비 은퇴자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에는 성인 자녀 뒷바라지에 대한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다.

21일 NH투자증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부모에게 손 벌려서 살아가는 30~40대 성인 자녀는 64만9000명에 달한다.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부모 돈으로 생활하는 ‘백수 캥거루’부터 직장이 있으면서도 부모 집을 떠나지 않는 ‘한집 캥거루’까지 다양하다.

황명하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연구위원은 “부모 세대는 본인들의 노후 준비는 잠시 미루고 희생한다는 개념으로 자녀 지원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하지만 자녀의 재무 독립이 늦어지고 지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부모의 노후 파산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말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성인 60% “자녀 뒷바라지하겠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의 경제적 독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난달 본지가 SM C&C 설문 조사 플랫폼인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알아봤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는 속담처럼, 설문 결과를 보면 우리 사회에 왜 캥거루족이 늘어나는지 엿볼 수 있다.

부모 집에 얹혀 사는 30~40대 캥거루를 주변에서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성인 남녀 응답자 1011명의 65%가 ‘그렇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10명 중 8명은 자녀가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할 적정 나이로 20~30대를 꼽았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독립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전체의 9.2%였다.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려면 어느 정도의 소득이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에서는, ‘월 300만원’이라는 응답이 46%로 가장 많았다.

시집·장가까지 보냈으면 부모 구실은 다한 것이란 생각은 대세가 아니었다. 자녀가 결혼한 이후에도 재정적인 지원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성인 남녀 응답자의 57%가 ‘능력만 된다면 지원하겠다’고 답했다. ‘능력 여부와 상관없이 지원하지 않겠다’는 응답자 비중은 26%에 그쳤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최고의 효도는 ‘적기 독립 선언’

“노후 준비의 90%는 끝낸 것처럼 홀가분하더군요.”

공공기관 직장인인 50대 오모씨는 대학을 졸업한 딸이 지난해 은행원으로 취업하자 뛸 듯이 기뻤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딸이 백수인 상태에서 퇴직 시점이 닥쳐올까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오씨는 “주변에서 최고의 노후 대책은 자녀가 직장을 구해 독립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직접 겪어보니 사실이었다”면서 “퇴직이 임박했는데 애들이 취업은커녕, 아직 학업조차 끝내지 못했다고 고민하는 지인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자식 사랑이 끔찍한 한국에선 노후 준비는 뒷전이고, 자녀 지원이 우선이라는 부모들이 많다. 문제는 자녀 뒷바라지가 금방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입 N수, 교환학생, 취업준비, 만혼(晩婚)·비혼(非婚) 등으로 자녀의 사회 진출 시기가 계속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 큰 성인이라도 도움을 청하는 자녀를 나 몰라라 하긴 어렵다. 자녀가 상처 받아 어긋날까봐 모질게 잔소리도 하지 못한다. 결국 자녀 스스로 깨우치고 독립 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신경전이 계속된다.

한동안 엄카(엄마신용카드의 줄임말)로 생활했다는 30대 이모씨는 “어느 날 문득 부모님 두 분 모두 영원히 사시진 못하고 나도 늙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어 일자리를 구했고 지금은 그럭저럭 돈을 벌고 집에 생활비도 내면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언제 철들래”... 70대 노부부의 고민

70대인 A씨 가족은 매달 받는 연금 220만원(남편 160만원+아내 6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부부가 알뜰하게 살면 크게 모자라지 않는데, 문제는 장남이다. 곧 마흔이 되는 장남은 인간 관계가 힘들다며 20년째 일하지 않고 있다.

A씨는 “현역 시절 월급이 나왔을 땐 괜찮았지만, 은퇴해서 연금만 나오는 지금은 매달 50만원 적자”라며 “부족한 생활비는 퇴직금 통장에서 조금씩 빼서 쓴다”고 말했다. A씨가 평균 수명까지 다 살기도 전에 퇴직금 통장 잔고는 바닥날 테지만, 부부는 나중에 혼자 남게 될 장남의 생계를 더 걱정한다.

한국의 미래를 보여준다는 일본에선 중년 자녀를 돌보는 노부모들의 사연이 넘쳐난다. 중년 자녀들은 고성장 시대에 자산을 많이 축적한 70~80대 부모의 연금에 기대어 산다. 하지만 부모가 사망하고 나면 생계가 끊긴다. 부모와 성인 자녀의 불편한 동거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사회 문제로 번지는 것이다.

재무컨설턴트 하타나카마사코(畠中雅子)씨는 “A씨의 경우엔 자택에서 평생 거주하길 원하지만 A씨가 사망한 다음엔 연금 소득이 줄기 때문에 모자(母子)의 선택지는 좁아진다”면서 “집을 매각한 이후, 월세가 싼 임대주택으로 이사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전문가들은 행복한 은퇴 생활을 꿈꾼다면 자녀 독립부터 1순위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미움 받을 각오를 하고 자녀와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자녀의 사회 진출과 독립 생활이 무난했던 과거엔 캥거루족이 드문 일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라며 “부모가 모든 걸 해줄수록 자녀의 의존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만큼, 특정 시점이 되면 자녀의 인생에서 뒤로 물러서는 게 옳다”고 말했다. 자녀를 책임질수록 자녀를 더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노후 생활에 복병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가르쳐야 한다. 자녀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면, 똑같은 금액을 본인 노후 준비에 쓰는 것도 방법이다. 가령 자녀 교육비로 월 50만원을 지출했다면, 부부 연금에 월 50만원을 입금하는 식이다. 노년기에는 목돈보다 연금이 더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