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증시에서 S&P500과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가 하루 만에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이날 PC·서버 제조업체인 델 테크놀로지스가 32% 폭등하며 상승세를 주도했다. 델은 전날 장 마감 후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와 함께 “AI(인공지능) 서버 주문량이 전년 대비 40%가량 증가하고 있다”고 밝혀 실적이 확 늘어날 것이란 기대를 자극했다. 이에 AI 반도체 업체인 엔비디아 주가도 4% 올라 시가총액 2조달러를 넘기면서 지수 상승을 견인했다.

일본 증시도 미국발(發) 반도체 훈풍에 사상 최고치 행진 중이다. 1일 닛케이평균은 1.9% 오른 3만9910.82로 마감해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다. 일본 시가총액 3위인 반도체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과 반도체 설계 업체 ARM 지분을 90% 보유한 소프트뱅크 등 AI 반도체 관련 종목들이 주가를 밀어올리고 있다.

반면 한국 증시는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지난달 26일 한국 증시 저평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기업가치 제고 정책인 ‘기업 밸류업(가치 상승) 프로그램’이 발표됐는데도 코스피 지수는 오히려 1% 가까이 빠졌다. 개인 투자자들은 예상과 달리 주주환원을 압박하는 패널티(불이익)가 담기지 않았다는 실망감을 표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미국과 일본 증시의 상승세가 한국과 달리 탄탄한 기업 실적에 따른 것이란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염동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정부 주도의 기업가치 제고 정책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한 마중물 역할은 할 수 있어도 펀더멘털(기업 기초체력)이 부진한 기업의 주가까지 개선시키기는 힘들다”고 지적했다. 돛 없는 배는 순풍도 밀어주지 못하듯 주가를 부양하려면 기업 실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실적이 가른 한·미·일 증시

블룸버그 통계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의 ‘어닝 서프라이즈’ 기업 비율은 한국보다 훨씬 높았다. 어닝 서프라이즈는 시장 예상보다 높은 실적을 발표하는 것을 뜻한다. 지난달 27일까지 작년 4분기(10~12월) 실적을 발표한 미국 S&P500 기업의 79%와 일본 닛케이평균 구성 기업의 50%가 시장 전망을 웃도는 순이익을 기록했다.

실제 주요 기업이 ‘깜짝 실적’을 발표할 때마다 주가는 들썩였다. 지난달 21일 엔비디아가 전년 대비 769% 급증한 4분기 순이익 실적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 미국 다우지수와 S&P500, 일본의 닛케이 지수가 나란히 사상 최고를 경신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코스피 기업의 22%, 코스닥 기업의 11%만이 작년 4분기 어닝 서프라이즈 달성에 성공했다. 실적 발표가 오히려 주가에 악재가 된 경우가 많은 셈이다.

한·미·일의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 도요타를 비교해도 차이가 크다. 작년 4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34.4% 감소했다. 연간 영업이익도 85%나 급감했다. 반면 미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작년 4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각각 17.6%, 32.5% 늘었다. 일본 도요타도 엔저(低) 효과와 하이브리드카 인기 등에 힘입어 최근 작년 연간 영업이익 전망을 종전 대비 9% 늘어난 4조9000억엔으로 상향했다.

그래픽=백형선

◇배당 확대가 주가 ‘요술봉’ 아냐

정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롤 모델 격인 일본 도쿄증권거래소가 이달 초 내놓은 보고서도 기업 실적을 강조했다. 보고서는 “기업가치 개선 계획을 수립할 때 일시적인 자사주 매입 등 일회성 주주환원 확대는 지양해야 한다”며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 수익 구조에 영향을 주는 펀더멘털 강화와 자원의 적정 배분에 중점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배당을 늘리는 주주친화 정책이 주가 상승을 유도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본질은 기업 실적이란 뜻이다.

미국 증시를 견인하는 7개 대형 기술주인 매그니피센트7(M7) 기업 중 아마존과 알파벳, 테슬라는 배당을 하지 않고 있다. 배당보다는 투자를 통한 성장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한국 증시 ‘밸류업’ 하려면

다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2월 한 달간 국내 증시에서 8조원 넘게 순매수(매수가 매도보다 많은 것)해서 역대 최대 규모로 사들였다. 해외에서 한국 증시 밸류업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다는 뜻이다.

신산업 혁신 기업이 나와야 한다는 등의 조언도 나온다. 미국 엔비디아처럼 우리도 신산업 경쟁력을 키워야 증시가 큰다는 것이다. 박장호 씨티그룹 글로벌마켓 대표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전반적 방향은 맞지만 결국엔 기업 실적이 좋고 성장이 있어야 주식시장이 큰다”고 했다.

한국 증시의 약점인 거버넌스(지배구조) 개선이나 불합리한 제도 혁파 등이 뒤따라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이제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해야 국내 증시로 외국인 투자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며 법인세와 상속세 등 각종 세제 개혁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