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역성장하며 ‘유럽의 병자’란 오명을 쓴 독일에서 증시는 고공 행진하고 있다. 독일 증시를 대표하는 DAX 지수는 지난달 21일부터 지난 1일까지 8거래일 연속 상승하며 연거푸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다.
이는 실물 경기와 거리가 멀다.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유탄을 맞아 지난해 -0.3% 역성장했다. 올해 전망도 어둡다. 지난달 독일 정부는 올해 성장률 전망을 1.3%에서 0.2%로 크게 낮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시는 역사적 활황인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올해 성장률 전망을 0.4%포인트 낮춘 프랑스에선 CAC40 지수가 지난달 23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범유럽 주가지수인 유로스톡스600 지수도 지난 1일 사상 최고치로 마감했다. 유럽연합(EU)이 올해 유로존 성장률 전망을 1.2%에서 0.8%로 내렸지만, 증시는 뜨겁게 달아오른 모습이다.
◇유럽 증시 활황… 왜?
이는 수출주 중심의 유럽 증시 특성 때문이다. 독일 증시의 시가총액 상위 기업엔 업무용 소프트웨어 기업 SAP, 지멘스, 에어버스, 메르세데스벤츠 등 수출주가 대거 포진해 있다. 프랑스 증시도 세계 최대 명품 기업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 그룹과 에르메스, 디올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상위에 있다.
영국계 투자회사 애버딘의 선진국 시장 담당 벤 리치는 “주가지수 구성 종목들의 매출이 주로 해외에서 발생하다 보니 자국 경제 의존도가 낮다”며 “실물 경기가 악화돼도 타격이 덜한 이유”라고 분석했다. 이 수출주들은 코로나 팬데믹 충격에서 벗어나 빠르게 실적을 회복하고 있다.
여기에 첨단 헬스케어와 AI(인공지능) 반도체 등 최신 투자 트렌드에 맞는 주도주가 각국 증시를 견인하고 있다.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는 비만 치료제 부문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며 올 들어서만 22% 올랐다.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를 독점한 네덜란드 ASML도 AI 열풍을 타고 연초 이후 31% 뛰었다. 프랑스에선 LVMH가 중국 판매 호조로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고공 행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쏠림 현상이 강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유로스톡스600 수익률의 절반 이상을 노보노디스크·ASML·LVMH 등 3종목이 견인했다고 한다. 오한비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유럽 증시 시가총액 상위 종목 위주로 글로벌 증시 주도 테마에 부합했고, 지지부진했던 중국의 경기 부양 기대감이 되살아나면서 명품 등 기존 주도주까지 반등했다”고 했다.
여기에 유럽 명품주 부활이 한몫하고 있다. 아르노 LVMH 회장은 지난 1월 실적 발표 후 콘퍼런스콜에서 “2019년보다 중국 소비자가 2배 많아졌다”고 밝혀 매출 확대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 증시에 안전한 방식으로 베팅하려는 글로벌 투자금이 유럽 명품주로 쏠리고 있다”고 했다. 올 들어서만 LVMH 주가가 15% 상승했고 페라리(+29%), 에르메스(+20%), 디올(+14%) 등도 오름세다. 새해 들어 명품 기업들이 잇달아 가격 인상에 나선 것도 주가에 호재가 되고 있다.
◇”역대급으로 저평가된 유럽 주식”
그러나 유럽의 주가 흐름이 실물 경기와 동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일각에선 ‘버블(거품)’ 우려도 나온다. 금리 인하 전망과 전 세계적인 위험 자산 선호 심리에 근거한 주가 과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발 조시 BCA 리서치 수석 전략가는 “유럽 주식은 고평가 논란이 일고 있는 미국 빅테크 주식의 훌륭한 대체재”라며 “장기 투자자라면 향후 몇 년간 실적 개선이 기대되는 유럽 주식 비율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반박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유로스톡스600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률로 따진 상대적 주가는 미국 S&P500 지수에 비해 역대급으로 낮아진 상태다. 그만큼 유럽 주식이 미국 주식보다 저평가됐다는 뜻이다. 세라 매카시 샌퍼드 C.번스틴 전략가는 “올해 유로스톡스600 기업의 전체 수익은 4.2%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낙관론에 힘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