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주 시장이 과열되며 올해 신규 상장한 11개 기업이 전부 공모가 희망밴드(범위)를 웃돈 금액에 공모가를 확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기업 가치를 높게 본 기관 투자자들이 수요 예측에서 높은 가격을 써낼 경우 확정 공모가가 희망가보다 올라갈 수는 있다. 하지만 증권가에선 그와 무관한 이유 때문이어서 문제라고 보고 있다. 투자 업계 관계자는 “주식시장이 횡보하는 와중에도 공모주만큼은 상장 첫날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보니 기관들이 경쟁적으로 물량 확보에 나서고 있다”며 “일단 가격을 높게 써서 공모주를 한 주라도 더 받고 보자는 욕심이 모여 공모가를 뻥튀기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기관은 상장 당일 가격이 높을 때 수익을 내고 빠져나오지만, 이런 배경을 모른 채 덜컥 투자한 개인들만 물려 손실을 떠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김현국

◇무용지물된 기관 수요 예측

올해 상장한 새내기주(스팩 제외) 11개는 모두 확정 공모가가 희망가 밴드를 초과했다. 이 중 희망가 밴드 최상단을 20% 이상 초과한 곳은 이닉스(27%), 에이피알(25%), 케이엔알시스템(23%), HB인베스트먼트(21%), 케이웨더(21%), 포스뱅크(20%) 등 절반(6곳)에 달한다. 통상적인 범위(희망가의 20% 내)를 크게 벗어나는 이례적 상황이다. 급기야는 지난달 말 체외진단 전문기업 오상헬스케어는 공모가 희망 밴드 최상단(1만5000원)을 33% 초과한 2만원에 공모가를 최종 결정했다. 수요 예측에 참여한 기관의 98%가 밴드 최상단보다 높은 가격을 써냈다고 한다. 업계에선 “비정상적인 상황”이라 입을 모은다.

상장사와 주관사는 공모 희망가를 밴드 형태로 제시한 뒤, 수요 예측에 참여한 기관들의 눈높이를 고려해 최종 공모가를 확정한다. 기관 투자자가 기업 가치를 검증하는 것이어서, 개인들은 수요 예측 흥행 여부를 중요한 투자 지표로 참고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관 투자자의 검증 기능이 마비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작년 6월 상장일 가격 상승 제한폭이 이른바 ‘따따블’(공모가의 400%로 상승)까지 확대된 뒤 공모주 시장이 하루짜리 단타 ‘도박판’으로 변질됐다는 말이 나온다. 공모주 물량만 있으면 상장 당일 고수익을 거둘 수 있어 기관들의 공모주 쟁탈전이 뜨거워졌다. 올해 1~2월 신규 상장주의 공모가 대비 상장일 종가 수익률은 평균 125%로 작년 평균(72%)의 두 배에 가깝다.

여기에 수요 예측 첫날 주문을 낸 기관에 공모주 물량 배점 가점을 주는 ‘초일가점’ 제도가 도입되며 기관들이 첫날부터 높은 가격을 써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반부터 높은 가격들이 나와버리면 다른 기관도 눈치를 보며 가격을 따라 올릴 수밖에 없다. 이경준 혁신IB자산운용 대표는 “느긋하게 기업 가치를 따져 주문을 내는 순간 그 펀드매니저는 (돈 벌 기회를 날려) 실직자가 될 것”이라며 “기관이 개인들보다 못한 행동을 앞장서서 하고 있어 너무 창피하다”고 했다.

◇기관 ‘단타’에 개미만 눈물

그런데 이렇게 기관들의 과열 경쟁으로 공모가가 높게 정해져 상장일에 급등했던 주가가 추락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올해 신규 상장한 11개 종목 중 HB인베스트먼트와 포스뱅크, 스튜디오삼익 등 3곳은 지난 8일 주가가 공모가 밑으로 떨어졌다. 공모가에 근접한 종목도 상당하다.

그러나 정작 기관들은 별 손해를 보지 않는다. 대부분 상장 첫날 주가가 급등하면 곧장 팔고 빠지기 때문이다. 수요 예측 때 가격을 높게 써내는 대신 ‘상장 후 일정 기간 동안은 주식을 팔지 않겠다’는 의무보유확약 조건(락업)을 걸지 않는 추세다. 지난해 기관의 의무보유확약 비율은 평균 26.4%(코스닥 기준)였는데 올해는 11%로 뚝 떨어졌다. 스팩전문투자회사 ACPC 남강욱 부사장은 “공모가 과열이 불러올 파장을 알고 있지만, ‘나만 손해 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들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기관들의 대량 매도는 주가 급락을 부추겨 뒤늦게 주식을 산 개인 투자자들의 피해만 키운다. 남 부사장은 “주식 발행 시장이 혼탁해지면 그 뒤의 유통 시장도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