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위기 등으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7개월 만에 장중에 1400원을 터치한 가운데, 이달 국내 상장사의 배당금 지급이 시작되자 외환 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현재 원화 약세는 중동 불안으로 인한 안전 자산인 달러 선호, 미국 금리 인하가 미뤄진다는 전망 등 주로 대외 요인 때문이다. 하지만 조만간 국내 기업의 배당금을 받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국으로 송금하기 위해 ‘원화를 팔고, 달러를 매수’하면서 원화 약세에 더 기름을 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16일 “외환 당국은 환율 움직임, 외환 수급 등에 대해 각별한 경계심을 가지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지나친 외환 시장 쏠림 현상은 우리 경제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구두 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4월에만 외국인 배당금 9조원
16일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4월 한 달간 총 9조2400억원의 배당금이 외국인 주주들에게 지급될 전망이다. 오는 19일 삼성전자(약 1조1619억원), 현대차(약 6606억원), 삼성화재(약 4059억원) 등 외국인 배당금 상위 기업들의 배당 지급 일정이 집중된다. 다음 주 중에는 SK하이닉스(1160억원), LG화학(1058억원), SK텔레콤(943억원) 등의 배당금 지급이 예정되어 있다. 올해 외국인 배당금 총 추정액은 9조5000억원으로 4월에 집중돼 나간다. 외국인 배당금 자체는 작년(9조235억원)과 비슷하지만, 중동 위기, 미국 금리 인하 지연 등 대외 요인과 결합되면서 원화 환율이 더 높은 압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강달러 확대와 함께 외국인 배당금 지급에 따른 달러 수요가 더해지면서 원화는 4월 들어 주요국 통화 중 가장 큰 약세를 기록하고 있다”며 “중동 갈등 전개 상황에 따라 확전으로까지 연결될 경우 1440원까지 갈 수 있다고 예상한다”고 했다. 한 증권가 관계자는 “그동안 주요 기업의 실적 개선과 수출 호조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배당금을 국내에 재투자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했지만,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위험이 증가하면서 재투자를 위해 배당금을 유보하기보다는 원화 약세로 인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자국에 송금할 유인이 커진 상황”이라고 했다.
매년 외국인 배당은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해왔다. 지난해 4월 달러 약세 분위기 속에서도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상승한 것은 배당금 지급의 영향이 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3일 미 CNBC 인터뷰에서 “변동환율제를 채택한 만큼 환율 변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큰 변동성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며 “4월은 전통적으로 외국인 투자자에 많은 배당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압력을 받고 있지만 이후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외 불안 요인 여전
중동 불안으로 인한 안전 자산인 달러 선호, 미국 금리 인하가 미뤄진다는 전망 등 대외 요인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주말 이란의 이스라엘 본토 공습에 대해 이스라엘은 ‘고통스러운 보복’에 나설 것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의 소비 호조 등으로 미국의 금리 인하 전망은 점점 뒤로 밀리고 있다.
15일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소매 판매는 전달보다 0.7%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집계한 전문가 예상인 0.3% 증가를 두 배 넘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미국 경제가 강하다는 지표가 잇따르면서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시기가 6월에서 9월로 밀릴 수 있다는 전망은 강화되고 있다.
◇원화 약세, 고물가 부채질하나
원화 약세는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최근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로 인해 나타나고 있는 국제 유가 상승과 환율 상승이 결합되면, 가뜩이나 고물가로 고통받는 한국 경제가 더 힘들어질 우려가 커진다. 원화로 표시한 유가는 국제 유가 상승분에 환율 상승분이 더해져 ‘이중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월(3.1%)과 3월(3.1%) 2개월째 3%대를 기록하고 있다. 국제 유가는 중동 위기 영향으로 배럴당 1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유가 상승은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뿐 아니라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무역 구조상 항공·해운 등 물류업을 비롯해 자동차·조선·철강 등 업종에서도 물류비와 함께 생산 원가를 치솟게 할 수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중동 사태로 인한 국제 유가 상승은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부추김과 동시에 달러 강세 흐름이 더욱 뚜렷해지고, 에너지 수입 비중이 높은 한국 등 아시아 통화에 약세 압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