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 받을 재산이 없어서 열심히 벌고 독하게 모아야 해요. 40대 맞벌이인데, 지금 통장에 1억 정도 있으면 중간은 갈까요?” “생활비 때문에 어제 한바탕 다퉜어요. 남편이 이렇게 (다 쓰고) 살면 늙어서 애들한테 구박 받는다고 잔소리가 심해요.”
대출 이자와 생활 물가가 오르면서 가계부 리모델링을 고민하는 개인들이 늘고 있다. 가계부 리모델링이란, 현재 가정 경제 상황을 냉정하게 살펴보면서 문제점을 찾아 바로 잡는 것이다. 고물가·고금리가 장기화하는 재테크 격변기에 가계부 리모델링을 하는 것과 하지 않은 가정의 10년 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가계부 리모델링의 첫 단계는 현황 진단이다. 나와 같은 연령대 집단의 재무 상황을 알아야 내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통장 상황은 나에게 동기 부여도 되면서, 내 자신의 재무 목표를 재확인하고 수정할 때에도 유용하다.
조선일보 [왕개미연구소]가 22일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에 의뢰해 연령대별 금융자산 현황을 살펴봤다. 금융자산은 예·적금, 주식, 채권, 보험, 전·월세 보증금 등 현금성 자산을 의미한다.
✅50대 8612만원이면 중간... 30대는 8583만원
“옆 부서 김 과장은 통장에 얼마나 모아뒀을까?” 궁금하지만 대놓고 물어보기는 어려운 질문이다. 이럴 때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가계금융복지조사다. 전국 2만여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표본 조사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기관의 발표 자료보다 신뢰도가 높다.
내 나이에 금융자산은 얼마 정도 있어야 중간일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에 따르면, 연령대별로 나눴을 때 50대 가구(2인 이상)의 금융자산 중앙값이 8612만원으로 가장 높았다. 중앙값(Median)이란, 데이터를 나열했을 때 정확히 한가운데에 있는 수치를 말한다. 50대 가장이 수중에 8600만원 정도 갖고 있다면 동일 연령대 인구 집단에서 중간이라는 얘기다. 그 다음으로 금융자산 중앙값이 높은 연령대는 30대(8583만원)였고, 70대의 금융자산 중앙값이 3510만원으로 가장 낮았다.
김진웅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장은 “고령 세대는 부동산 투자에 집중한 경우가 많은 데다 연금 준비도 미흡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금융자산 비중이 낮다”면서 “30대는 금융자산을 모아서 부동산으로 넘어가는 단계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융자산이 많다”고 말했다.
중앙값은 평균값과는 다른 개념이다. 가령 50대를 금융자산 액수대로 줄세우면 중간에 위치한 사람은 8612만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전체를 더해서 산출하는 평균값은 1억6145만원이다. 40대도 중앙값은 8020만원이지만 평균값은 1억5200만원으로 더 높다.
양극화가 심할수록 중앙값과 평균값 격차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소득이 끊기는 은퇴 이후 세대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70대의 금융자산 중앙값은 3510만원이지만, 평균값은 9552만원으로 3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50대, 최상층 커트라인 5억8910만원
내 금융자산 수준이 동일 연령대에서 중간은 된다고 해서 만족하면 곤란하다. 중간 수준으론 넉넉한 노후 생활을 꿈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유로운 노후 준비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금융자산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50대 주부 황모씨는 “인생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100세 현금 흐름표를 꺼내서 본다”면서 “오십 근처가 되니까 통장이 주는 든든함이 소비 만족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상위인 1등급(상위 누적 4%)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일까. NH투자증권에 따르면, 연령대별 금융자산 1등급 컷은 50대가 5억8910만원으로 가장 높았다. 인생의 절정인 50대는 소득이 높아서 자산도 그만큼 많이 축적하는 시기다. 학원비 등 자녀 양육이나 부채 상환도 상당 부분 끝나므로, 자산 증가 속도가 빠르다. 50대 다음으로는 40대(5억7220만원), 60대(4억7560만원), 30대(4억3934만원) 순으로 최상층 커트라인이 높았다.
최범규 골든트리투자자문 FA운영본부장은 “성공적인 노후는 아무런 노력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자산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자산부자의 삶을 선택해야 나이가 들수록 부(富)가 부(富)를 끌어 당기는 삶을 살게 되고, 주변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로 채워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韓日 금융자산 비교해 보니
한국은 60~70대 등 은퇴 세대보다는 아직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30~50대의 금융자산 중앙값이 더 높게 나타난다. 현 고령 세대는 금융자산보다는 부동산 위주로 자산을 증식해 왔기 때문이다. 은행 대출을 끼고 내집 마련을 하고, 오랜 기간 원리금을 갚아 나가는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금융자산을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연령대별 금융자산 상황을 살펴 보면, 한국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서 흥미롭다. 일본은 나이가 들수록 금융자산이 더 늘어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일본 금융홍보중앙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일본의 60~70대의 금융자산 중앙값은 700만엔(6250만원)으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장수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일본 노인들은 부동산보다 금융자산 보유에 더 힘쓰고, 마르지 않는 현금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데에 신경을 쓰고 있다.
김진웅 100세시대연구소장은 “한국 고령층은 오래 일한 것에 비해 소비 여력이 낮은데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며 “금융자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노후 빈곤율도 단시일 내에 개선되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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