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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150엔대 후반에서 움직이는 초엔저가 지속되자, 이를 막기 위해 외환 당국이 1년 반 만에 외환시장에 실제 개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엔저로 인해 수입 가격이 오르면서 학교 급식에서 미국산 쇠고기가 사라지는 등 다양한 백태도 벌어지고 있다.

◇ 초엔저 막으려 달러 ‘팔자’ 개입

3일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 외환 당국은 최근 한 달간 역대 최대 규모인 약 9조7885억엔을 투입해 달러를 팔아 엔화를 매수하는 외환시장 개입을 했다. 2022년 10월(개입액 6조3499억엔) 이후 약 1년 반 만의 실제 개입이다.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160엔에 육박하자 구두 개입이 아니라 실제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래픽=김하경

초엔저에서 벗어나려면 금리를 올려야 한다.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3월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한 일본은행이 이르면 6∼7월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이 퍼지고, 일본은행이 국채 매입량도 줄일 가능성이 시장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일본의 장기 금리 지표인 10년 만기 국채 금리도 연 1%를 넘어서 계속 상승하고 있다.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일본 채권시장에서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전일보다 0.04%포인트 오른 연 1.075%를 기록했다. 2011년 말 이후 최고 수준이다. 일본 언론에선 시장금리가 연 1% 선을 넘어서자 ‘금리 있는 세계’가 왔다고 한다.

◇급식에서 쇠고기가 사라졌다

초엔저로 일본 생활상도 바뀌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일 “엔화 약세가 서서히 일본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일본 한 초등학교 급식에서 쇠고기가 사라졌다. 미국산 쇠고기의 일본 내 도매가가 1991년 수입 자유화 이후 최고 수준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는 중장기 국력으로 이어지는 인재, 과학기술과 방위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미국 연봉 비교 사이트 레벨스(levels.fyi)에 의하면, 도쿄의 정보기술(IT) 엔지니어 연봉은 달러로 환산해 6만2530달러다. 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4분의 1이고, 싱가포르나 중국 베이징보다도 약 30% 낮다. 신문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일본에서 일할 동기가 약해지고 있다”고 했다.

지난 4월 도쿄공업대학이 가동을 시작한 최신 수퍼컴퓨터는 달러로 계약한 리스료가 엔화 약세로 30%나 늘었다. 방위 분야에선 최신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와 수송기 취득 비용이 예상보다 늘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경제는 이제 엔저에 의지하는 단계가 아니다. 수출로 번 돈을 성장 원천으로 삼는 경제 모델에서 졸업했다”며 “물가와 임금이 오르기 시작한 지금이야말로 성장 모델을 다시 그릴 수 있는 적기다. 새로운 성장 전략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엔화 약세 계속될 수도

전문가들은 미일 통화 정책 방향에 따라 향후 엔화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오재영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일본 금융 당국의 개입은 일시적인 환율 방어 역할만 할 뿐, 달러 강세·엔화 약세 요인이 완화돼야 엔화의 강세 전환은 나타날 것”이라며 “향후 엔화 흐름은 일본은행의 통화 정책보다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통화 정책 향방에 좌우될 것”이라고 했다. 과거처럼 ‘미국 금리 인상, 일본 마이너스 금리’ 체제에선 엔화 약세가 어쩔 수 없지만, ‘미국 금리 인하, 일본 금리 인상’ 체제에선 미국의 금리 인하 폭에 따라서 엔화의 약세 또는 강세 방향이 결정될 것이란 얘기다.

다만 니혼게이자이는 일본의 경제 구조가 바뀐 것을 감안하면 엔화 약세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신문은 개인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주식 투자를 하고 있고, 일본 기업들이 갖고 있는 엔화를 달러로 바꿔 해외 IT(정보기술) 기업에 지불하는 돈이 늘어나면서 ‘디지털 적자’가 생기는 것도 엔화 약세의 요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경제와 주식시장 입장에서 수퍼 엔저 현상은 달갑지 않다”며 “수퍼 엔저가 상대적으로 일본 증시의 투자 매력도를 높일 수 있어 국내 증시엔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