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하경

최근 중소 증권사들에서 주요 상장 기업에 대한 ‘매도’ 의견을 담은 분석 보고서가 연달아 등장해 증권가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최근 1년간 국내 5대 증권사들에선 매도 의견 보고서가 한 건도 없었음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란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매수 의견이 많고, 매도 의견은 너무 부족해 투자자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소형 증권사서 나온 매도 보고서

정원석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달 28일 이차전지 대장주(株) 에코프로비엠에 대해 ‘매도’ 의견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냈다. 목표 주가는 20만원에서 15만원으로 낮췄다.

정 연구원은 당시 “전기차 수요 부진, 양극재 판매가격 하락 등을 고려할 때 현재의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보고서가 나오는 날 이 회사 주가는 4.75% 하락하기도 했다. 10일 이 회사 주가는 21만5500원에 마감했다.

에코프로비엠 등 이차전지주 하락세는 올 초 시작됐지만, 사전에 매도 의견을 내는 증권사 보고서는 찾기 어려웠다. 정 연구원은 “매도 보고서를 내기 하루 전 에코프로비엠 주가가 6%쯤 올랐는데 일부 개인투자자들은 ‘주가를 떨어뜨리기 위한 의도를 갖고 보고서를 낸 것 아니냐’며 오해하기도 했다”며 “매도 의견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진 않으니 오히려 충분한 근거와 논리를 갖추려 애쓴다”고 했다.

한편 서정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지난 3일 보고서에서 롯데하이마트에 대해 “코로나 이후 가전 소비 둔화가 회사 실적에 큰 후유증을 줬다”며 투자 의견을 중립에서 ‘매도’로 하향하고 목표 주가는 1만원에서 7000원으로 내렸다. 10일 롯데하이마트 주가는 9260원으로 마감했다. 서 연구원은 올해 3월엔 이마트의 온·오프라인 실적 부진에 대해 “갈팡질팡하다 이도 저도 잘해내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그래픽=김하경

◇5대 증권사 ‘매도 의견’ 보고서 0건

이처럼 일부 중소형 증권사에서 매도 의견이 등장하긴 하지만, 증권가에서 매도 보고서를 찾아보기 힘들다. 10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3월 31일부터 1년간 미래에셋·NH투자·삼성·한국투자·KB증권 등 국내 5대 증권사가 낸 기업 분석 보고서 중 ‘매도’ 의견의 보고서는 0건이었다.

매수 의견 비율이 증권사별로 77~94%로 가장 높았고, 중립(보유) 의견이 5~22%를 차지했다. 다만, 다올투자증권(0.6%), 하나증권(0.5%), 신영증권(0.7%) 등 중소형 증권사에서 매도 의견을 담은 보고서가 소량 등장했다.

미국의 경우 분위기가 다르다. 10일 시장 정보 업체 팩트세트에 따르면, 최근 S&P500 기업들에 대한 증권사 보고서 1만1713개 중 매수 의견이 54.8%, 중립 의견이 40.2%였다. 매도 의견은 5%로 집계돼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왜 매도 의견 사라졌나?

국내 증권사의 매도 의견 보고서가 전멸하다시피 한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특정 기업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매도 의견을 낸 증권사를 향해 쏟아내는 비난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거 매도 의견을 낸 증권사 연구원이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하나증권은 지난해 4월 이차전지주 에코프로에 대해 매도 의견 보고서를 냈는데,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공매도(차입 주식 매도) 세력의 돈을 먹었다” “X새끼” 등 욕설 게시 글이 수십 건 올라왔다. 이를 작성한 연구원은 출근길에 붙잡혀 투자자들에게 욕설을 듣기도 했다.

증권사 입장에선 ‘고객’인 기업들의 이탈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말도 있다. 상장사들은 증권사의 기업 분석 대상이면서 동시에 주식이나 채권 발행, M&A(인수합병) 등의 업무를 의뢰하는 고객이기도 하다. 매도 보고서로 증권사와 기업 간 소통 창구가 끊어질 경우 증권사 입장에선 큰 손해를 보게 된다.

매도 보고서가 활성화되려면 투자자들의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업계에선 기업이나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매도 의견 보고서를 쓸 바에 차라리 보고서를 쓰지 말자’는 이들도 있다”며 “매도 의견도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는 게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