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성 공모주 청약을 막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대책을 시장 참여자들이 오히려 악용하고 있는 가운데, 금융감독원이 제도 보완에 나설지 주목된다. 기업공개(IPO) 제도 개선으로 지난해부터 기관 투자자(자산운용사 등)의 수요예측 기간이 2일에서 5일로 늘었고, 이로 인해 빨리 예측에 참여할수록 공모주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를 초일가점이라고 한다. 타 기관의 눈치를 보지 말고 적정 수준의 가격을 발견할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는 것이 정부의 의도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여러 기관이 공모주를 1주라도 더 받기 위해 수요예측 첫날에 ‘묻지마’ 참여를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금융당국은 이같은 문제점을 인지하고 관련 제도를 수정할 여지가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20일 금융당국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IPO 주관 업무 혁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한 금융감독원은 올해 하반기 중으로 수요예측 제도의 개선 방안을 검토한다. 지난달 IPO를 주관하는 증권사가 무리하게 상장을 추진하지 않도록 수수료 구조를 개선한 금감원은 추가적으로 IPO 뻥튀기의 핵심인 수요예측 제도에 칼을 대려는 상황이다.
수요예측이란 상장 업무 주관사인 증권사가 기관에 상장 예정 기업에 대한 투자 여부를 묻는 과정이다. 이때 투자를 원하는 기관은 매입을 원하는 주식의 수량과 가격을 주관사에 제출한다. 기관이 많이 참여할수록, 또 이들이 높은 값을 부를수록 경쟁이 치열하다는 의미이고 자연스레 상장 예정 기업의 공모가는 비싸진다.
이번 제도 개선은 2022년 금융위원회가 ‘허수성 청약 방지 등 IPO 건전성 제고 방안’을 내놨음에도 공모주 시장이 여전히 과당경쟁으로 치닫고 있다는 판단에서 시작됐다. 당시 금융위는 LG에너지솔루션 사태를 겪으면서 수요예측을 보다 내실있게 해야 한다고 봤고, 지난해부터 수요예측 기간이 기존 2일에서 5일로 늘어났다.
이 외에도 ▲주가 급등락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상장 당일 최고가를 공모가의 2.6배에서 4배로 확대 ▲주관사에 기관 주금납입능력에 대한 확인 의무 부여 ▲의무보유 확약(공모주를 받아도 일정 기간 주식을 팔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 물량에 대한 최우선 배정 원칙 등이 신설됐다.
문제는 수요예측 기간이 늘어나면서 첫날 참여한 기관이 공모주를 배정받는 데 유리해졌다는 점이다. 당초 첫날 참여 기관에 인센티브를 준 건 타 기관이 얼마를 써내는지 눈치보지 말라는 취지였다. 해당 기업의 적정 주가가 얼마인지 스스로 판단한 기관은 공모주를 배정할 때 우대해 주자는 의미였다.
증권사의 가이드라인 성격인 ‘금융투자협회 대표주관업무 등 모범기준’에 따르면 수요예측이 2일이었을 땐 첫날에 참여한 기관은 가중치 2점을 받았다. 그런데 수요예측 기간이 5일로 늘어나면서 가중치는 3점으로 증가했다. 가중치 3점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금투협 모범기준이라 증권사가 이를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참고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렇다 보니 제도를 악용하는 기관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요예측 첫날, 상장 준비 기업의 희망가(공모가 희망 밴드)보다 높은 가격에 왕창 주문을 내는 것이다. 비싼 가격을 적어 내면 공모주를 우선 배정받기 유리하다는 걸 아는 기관이 첫날 가중치까지 노린 작전인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기관은 상장 당일 주가가 공모가보다 오를 것이라고 예상한 종목에 대해선 비이성적인 주문을 넣는다”며 “보통 수요예측 첫날에 밴드 상단보다 30% 높은 가격을 써내 공모주 물량을 많이 받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올해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29개 종목(스팩·리츠 제외)을 보면 27개 종목이 희망 밴드보다 높은 수준에서 공모가가 결정됐다. 이들 종목의 공모가는 희망 밴드 중 최상단 가격보다 평균 23.0% 비싸게 결정됐다. 특히 엔젤로보틱스와 아이엠비디엑스는 이 수치가 30%를 넘겼다.
희망 밴드 내에서 공모가가 결정된 나머지 2개 종목도 사실 상단 초과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특히 HD현대마린솔루션은 공모가 희망 범위가 7만3300~8만3400원이었는데, 수요예측 청약 결과가 잘 나왔음에도 최상단인 8만3400원으로 결정했다. HD현대마린은 상장 후 최고 20만7500원까지 올랐다.
증권업계에선 가격을 책정할 능력이 있는 기관만 수요예측에 참여하도록 문턱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재는 아무리 영세한 기관이라도 수요예측에 참여해 매력적인 가격을 제시하면 증권사가 해당 기관에 공모주를 배정해야 한다. 법으로 규정된 사항은 아니지만, 이런 기관을 의도적으로 제외하면 금감원을 통해 민원이 들어가서다. 이 때문에 큰손 개인이 운용사를 인수해 기관으로 둔갑해 수요예측에 뛰어드는 상황이다.
IPO 업무를 담당하는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인기 있는 IPO는 2100개가 넘는 기관이 수요예측에 참여하는데 그중 적정한 공모가를 발견할 깜냥이 없는 곳이 2000개를 넘는다”면서 “공모주 배정 과정을 완전 시장(주관사)에 맡기는 방안도 생각해 볼 만 하다”고 조언했다.
☞LG에너지솔루션 사태
단군 이래 최대 IPO로 불리던 LG에너지솔루션이 2022년 1월 상장을 준비하자 수요예측 단계에서 자본금 10억원도 안 되는 자산운용사가 10조원에 가까운 주문서를 내는 사례가 여럿 적발됐다. 상장 당일 주가가 공모가보다 높을 것을 예상한 기관들이 1주라도 더 받기 위해 감당하지도 못할 주식의 규모를 제출한 것이다. 이에 LG에너지솔루션의 공모가는 회사의 희망 공모가 범위(25만7000~30만원) 최상단인 30만원에서 결정됐다. 이는 과열된 IPO 시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금융당국이 관련 대책을 내놓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