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성규

정부가 한국 증시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소액 주주 보호를 위해 제안한 상법 개정을 두고 재계와 증권가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 상법 제382조에서 기업 이사가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정부의 상법 개정 계획은 그 대상에 ‘주주’를 추가하는 게 골자다.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단체 8곳은 24일 상법 개정 계획에 반대하는 공동 건의서를 정부와 국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재계는 “현행 법체계로도 충분히 주주 권리를 보호할 수 있고, 개정으로 경영 혼선만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밸류업을 지지하는 증시 전문가 모임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지난 20일 ‘밸류업과 이사 충실 의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재계 논리를 미리 반박했다. 이들은 “전체 주주에 대한 이사들의 충실 의무를 확대해 지배 주주뿐 아니라 소액 주주 가치도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네 가지 주요 쟁점을 살펴봤다.

그래픽=김성규

① 글로벌 스탠더드에 위배

재계는 “주요국 중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 외에 주주의 이익까지 병렬적으로 규정하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고 했다.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 제102조에 있는 ‘회사나 그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위반이 있는 경우’라는 문구에 대해선 “회사의 이익이 되면 주주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일반론적 문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천준범 와이즈포레스트 대표는 “지배 주주가 다른 주주에게 충실할 의무를 부담하는 법제가 많다”며 “미국 델라웨어 회사법뿐 아니라 독일 회사법 등에 지배 주주가 소수 주주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있다”고 했다.

② 현행법으로 충분

재계는 “소수 주주 보호를 위한 각종 조치는 자본시장법 등 현행법으로도 가능하다”며 “특히 이사의 업무상 배임에 관해서는 상법뿐만 아니라 형법에도 강력한 처벌 규정이 완비돼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상법 개정 취지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언급하는 것에 대해 “이사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할 경우 비상장 기업은 기업 공개를 꺼릴 수 있어 오히려 주식시장 활성화에 역효과”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상훈 경북대 교수는 “상법 개정을 통해 기업 가치와 주주 가치가 괴리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의장은 “투자자 보호 장치가 전혀 안 된 한국 주식에 장기 투자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했다.

③ 경영 일선의 혼란 초래

재계는 “상법 개정이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회사 성장을 위한 구조 조정이나 지배 구조 개편 과정에서 이사들이 내리는 정당한 의사 결정을 모두 ‘지배 주주에게 유리한 결정’이라고 왜곡하고 부당하게 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한국 기업을 상대로 한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 공격이 증가하는 추세”라며 “현행법상 우리 기업들은 세계적으로 활용되는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등 마땅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가 목표로 삼은 한국 기업 수는 2019년 8곳에서 지난해 77곳으로 9.6배가량 증가했다.

그러나 이상훈 교수는 “경영자의 사적 이익과 전체 주주의 이익이 충돌할 때 주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달라는 것”이라며 “경영권 방어를 왜 정부가 ‘법’으로 챙겨줘야 하는가. 주주의 경영권은 ‘내돈내산(내 돈으로 내가 샀다)’”이라고 주장했다.

④ 사법 리스크 증가로 기업가 정신 위축

재계는 손해배상 소송과 배임죄 고발 등이 남발돼 경영 판단이 위축될 것이라고도 우려한다. 재계는 “경영 판단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판단하는 주주들이 이사들에게 소송을 남발할 경우 기업가 정신 위축과 고급 인력 구인난으로 기업 밸류업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상훈 교수는 “배임죄의 범위가 확대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배임죄를 폐지 완화하는 동시에 민사 절차가 보강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김주영 법무법인 한누리 대표변호사는 “2004년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 제정 당시에도 재계를 중심으로 소송이 봇물을 이룰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지난 20년 동안 제기된 증권 관련 집단소송은 12건이 전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