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은행 창구./연합뉴스

“비메모리 상장지수펀드(ETF)가 최근에 많이 빠져서요. 이렇게 가격이 떨어졌을 때 주워 담아보세요.”

3일 서울 영등포구에 소재한 KB국민은행 영업점 창구 직원은 ETF를 추천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KB자산운용의 ‘KBSTAR 비메모리반도체액티브’라고 답했다. 계열 자산운용사가 아닌 미래에셋자산운용과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상품도 소개해 주긴 했지만 이름만 언급하는 수준이었다. 결론은 KBSTAR 추천이었고, 업계 1위인 삼성자산운용의 ETF는 은행원의 입에 오르지도 못했다.

은행·증권사 등 판매사가 계열 자산운용사 펀드를 밀어주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제가 나온 지가 10년이 넘었지만, ETF는 규제 대상이 아니다. 제도 도입 당시 금융위는 ETF는 공모·사모펀드와 달리 창구 직원의 영업이 아니라 투자자가 직접 선택하는 상품이라 계열사 몰아주기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처음 규제를 만들 당시와 비교해 시장 상황이 바뀌어 이 또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위원회 전경. /뉴스1

2017년 금융위는 연간 계열사 펀드 판매 규모를 2022년까지 25%로 축소하는 안을 골자로 하는 ‘신뢰받고 역동적인 자산운용시장 발전 방안’을 발표했다. 판매사인 은행 등이 영업점에 방문한 고객에게 투자를 권유할 때 그룹 계열사의 자산운용사의 펀드만 추천하지 말고, 다른 자산운용사의 펀드도 골고루 소개하라는 게 목적이었다.

이런 취지의 제도는 2013년 ‘50%룰’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50%룰이란 계열 운용사 펀드 판매액을 연간 신규 판매액의 절반 이하로 제한하는 제도인데, 판매사의 건전한 영업 행위는 물론 계열 금융사의 부실이 투자자에게 옮겨가는 걸 막기 위해 도입됐다. 동양그룹이 무너지기 직전, 동양증권 등을 통해 부실한 계열사 상품을 고객에게 떠넘긴 ‘동양 사태’가 제도 도입의 직접적 배경이었다.

처음엔 2년 한시 조항으로 시작했으나 금융위는 일몰 기한을 연장했다. 결국 2017년에는 한도가 50%에서 25%로 축소됐다. 시장 충격을 우려해 한 번에 25%로 줄이는 게 아닌, 매년 5%포인트(p)씩 정리해 2022년에야 목표한 25%가 되는 안이었다.

ETF는 대상에서 제외됐다. ETF는 대다수의 투자자가 스마트폰에 증권사 애플리케이션에서 직접 매수해 계열사 몰아주기의 가능성이 희박해서였다.

하지만 ETF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규제 당시와 상황이 달라졌다. 1명의 투자자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자산운용사 간 경쟁이 치열해졌고, 구원 투수로 판매사가 나섰다. 은행은 고객이 맡긴 자산을 관리하는 형태인 ‘신탁’으로 ETF를 판매하는데, 금융사가 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알맹이는 비슷해도 껍데기가 공모펀드인지, 아니면 ETF인지에 따라 판매 한도 규제가 달라지니 행원들이 계열 운용사의 ETF를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이다. 가령 KB국민은행 창구에서 공모펀드인 ‘KB 글로벌 메타버스경제 증권투자신탁’을 판매할 때는 25%룰 이 적용되지만, 이 펀드와 구성 종목 비중 상위 10개 중 7개가 동일한 ‘KBSTAR 글로벌메타버스Moorgate’는 ETF이기 때문에 한도 규제가 없는 것이다.

서울 시내 한 은행 창구 모습./연합뉴스

은행원은 증권사 직원만큼 ETF에 밝지 않아서, 통상 은행에서는 테마를 정해 고객에게 추천할 ETF를 몇 개 선정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라면 비메모리, 메모리, 미국, IT, 글로벌 반도체 등 분야를 나눠 추천할 ETF를 하나씩 정하는 식이다. 여기에 자사의 ETF가 들어가면 자산운용사에선 ‘창구에 걸린다’고 하는데, 계열 운용사가 아니면 은행 창구에 걸리긴 쉽지 않다.

영업력에 있어서도 은행원의 입김은 타 업권에 비해 압도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증권사 직원이 1시간 내내 상품에 대해 설명해도 멀뚱멀뚱하던 손님들이 은행 창구 아가씨가 설명하면 믿고 ETF를 가입한다”면서 “은행이 주는 신뢰감은 타 업권이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창구에서 판매되는 ETF의 규모가 적은 편도 아니다. 지난해 1~11월 은행이 특전금전신탁(퇴직연금신탁·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제외)의 형태로 ETF를 판매한 규모는 6조842억원이었다. 전체 ETF 중 5%가량이 은행 창구에서 판매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증권사에서도 나타날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지만 집계는 불가능하다. 증권사 직원의 추천을 듣고 매수했어도 고객이 직접 앱으로 매수한 규모는 따로 발라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픽=정서희

ETF는 최근 들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자산운용사의 먹거리다. ETF의 규모가 2020년 말에서 지난달까지 193.32% 불어날 때, 공모펀드는 51.38%, 사모펀드는 46.6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여전히 공모펀드와 사모펀드의 규모가 크긴 하지만, 성장 속도가 가파르다 보니 ETF는 자산운용사로서는 놓칠 수 없는 사업 영역이다. 더구나 ETF는 투자금을 돌려받기까지 3~5영업일 정도 걸리는 공모펀드보다 환매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사모펀드는 또 라임·옵티머스 사태 여파가 아직 남아 있어 판매사 직원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권하기 어렵다. ETF에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급변하는 자본시장의 환경 때문에 계열사 펀드 판매 한도 규제에 구멍이 생겼다”며 “보완 방법을 강구하고, 필요하다면 금융회사들의 영업 행태를 살펴 공정거래법상 부당지원행위 조사도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