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쓰임을 다한 물건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허무함에 무력감이 몰려와 무척 힘들었습니다.”(대기업 퇴직자 A씨) “돈 벌어야 보람찬 노후고, 놀면 허송세월이라고 하잖아요. 뒷방 노인이 된다는 생각에 우울증이 오더군요.”(회사원 B씨)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거치게 되는 정년 퇴직. 하지만 막상 일선에서 물러나면 무슨 일이 생기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럴 땐 나보다 먼저 은퇴를 경험한 인생 선배들의 생생한 경험담에 귀 기울이면서 실마리를 찾는 것이 최선이다.
꼬박 40년을 일하고 지난 2월 퇴직한 송양민 작가는 “돈벌이 목적의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으니 은퇴한 것이 분명하다”면서 “현역에서 퇴장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후 적금’이라고 생각해 꾸준히 부어왔던 연금을 받겠다고 신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 작가는 <밥·돈·자유>, <100세시대 은퇴대사전> 등 정년과 은퇴 준비에 관한 책과 칼럼을 많이 써 왔던 노후 전문가다. 송 작가 자신이 직접 퇴직하면서 알게 된 생생한 노후 꿀팁을 소개한다.
–은퇴 후 생활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시골집에 머물면서 ‘온종일 놀기’로 소일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을 숲 길을 강아지 두 마리(비숑, 푸들)와 함께 40분 산책한 뒤, 커피 한 잔 내려 마시고 면사무소 옆 주민체육시설에 가서 1시간쯤 가볍게 운동한다. 3개월 회원권이 5만원으로 저렴하다(서울 시내 헬스클럽 회원권은 팔았다). 동네 도서관에 가서 신문·잡지를 보거나 서가 책을 무작위로 꺼내 읽기도 한다.
오후에는 유튜브(주로 역사와 종교, 음악 콘텐츠)를 들으면서 마당 정원 손질하기, 잔디 풀 뽑기, 화분 꽃갈이 등을 한다. 가끔 낮잠도 잔다. 저녁에는 ‘뒷산 보며 멍때리기’를 한 다음, 햇볕에 바짝 마른 잔디에 물을 주거나 강아지와 놀아 준다. 밤에는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유튜브를 보며 빈둥거리고, 잠이 오면 그냥 잔다. 당분간 이런 ‘느린 삶(slow life)’을 조금 더 즐길 생각이다.”
–출근할 곳이 없어지면 우울해 진다던데...
“나를 비롯해 베이비붐 세대는 고교·대학 입시, 입사 시험, 승진 등 온갖 생존 경쟁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인지 ‘정년퇴직 통지서’를 받았을 때 나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고 편해졌다. 평생을 직장에 매여 지냈는데 정년퇴직하고 나서도 스스로 다시 속박되길 원해야 하는가. 어디라도 좋으니 아침에 출근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나는 인생의 여백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삼시세끼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자녀 양육이 얼추 끝나는 은퇴기야말로 부부 관계를 신혼 초기만큼 만족스럽게 바꿀 최고의 타이밍이다. 은퇴 후 최고의 친구는 ‘배우자’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우선 내가 직장에서 은퇴한 것처럼, 아내도 부엌에서 은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가 요리하기 싫다고 하면 외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점심은 웬만하면 집에서 먹지 않는다. 시내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아내와 적당히 나눠 먹는다. (아내에게 고마운 게 많아) 남은 인생은 말 잘 듣는 남편으로 살 생각이다.”
–은퇴하면 돈 걱정부터 한다더라.
“20년 전부터 아내와 함께 은퇴자금 마련 계획을 세워 꾸준히 실천했고, 그런 노력이 지금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토대가 된 것 같다. 국민연금, 사학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에 전부 가입해 수 십 년 불입했고, 지금은 도시 근로자 평균 정도의 월 소득을 확보했다. 아내 국민연금까지 합치면, 여가·취미 생활도 맘껏 즐길 수 있을 듯하다.”
–월급이 끊기면 불안할 것 같다.
“원래 은퇴 생활은 그런 것이다. 여유 시간은 갈수록 많아지고, 모아 놓은 돈은 갈수록 줄어드는 게 은퇴 생활이다. 그런데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한다고 해도 연금에만 의존해서 생활하는 것이 쉬운 건 아니다. 그래서 씀씀이를 줄이는 가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퇴직 전부터 지출의 군살을 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연금엔 얼마씩 넣어야 좋은가.
“연금은 많이 가입하면 할수록 좋다. 첫 연금을 받아보면 다들 똑같이 느끼게 될 것이다. 문제는 연금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우리 부부는 교육비(특히 과외비)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돌이켜 보면 은퇴 준비는 ‘현실과 미래의 충돌’인 것 같다. 자녀(교육비)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인가 아니면 부부의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현재 풍요로운 생활을 즐길 것인가 아니면 지금은 허리띠를 졸라 매고 미래에 여유롭게 살 것인가. 둘 다 의미 있는 선택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옳다고 하긴 어려운 것 같다.”
–연금 개시를 신청하기 전 챙길 점은?
“국민연금공단은 일정한 나이(62~65세)가 되어 수급 자격이 생긴 가입자에게 거주지로 안내 통지서를 보내준다. 나는 3년 전 62세가 되었을 때 수급 통지서를 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직장이 있던 터라 공단 지사를 찾아가 연금 수급을 연기하겠다고 신고했다. 그러다 지난 2월에 퇴직하고 나서 연금공단 콜센터에 연락해 연금을 개시하겠다고 알렸다. 국민연금은 수급 시기를 1년 늦출 때마다 연금액이 7%씩 가산된다. 3년 연기한 덕분에 내 예상보다 연금액이 꽤 많았다. 개인연금은 은행과 증권사를 방문해 수급 신청을 했다.”
–은퇴하면 건강보험료도 부담 아닌가.
“그렇다. 퇴직하면 가장 부담되는 것이 건강보험료다. 직장 다닐 땐 건강보험료(소득의 약 8%)의 절반은 본인이 내고, 나머지 절반은 고용주가 부담한다. 그러나 퇴직 후엔 지역가입자가 된다. 고용주가 따로 없어서 은퇴자 본인이 보험료를 다 내야 하니, 현역 시절보다 금액이 50~100% 많아지는 것이 보통이다.”
–소득이 끊기는데 돈은 더 내라니...
“은퇴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연금이나 금융소득에 부동산이 더해져서 건강보험료가 부과된다는 사실이다. 작년까지 자동차에도 건보료가 부과됐으나, 은퇴자 등골을 빼먹는다는 비판 여론 때문인지 올해부터는 빠졌다. 고소득 자영업자들이 소득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이상한 제도가 생겼고, 은퇴자가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다.”
–건보료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는 없나.
“퇴직하고 나서 ‘임의계속가입’을 신청하면 된다. ‘임의계속가입’은 3년 동안 한시적으로 퇴직 전 수준의 건강보험료만 내고 건강보험 혜택을 계속 챙길 수 있는 제도다. 나 역시 건보공단에 전화를 걸어 퇴직 사실을 알리고 ‘임의계속가입’으로 자격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건보공단 직원이 내 정보를 살펴 보더니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었다. 농촌 읍면(도농복합지역) 거주민은 건보료 22% 감면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지방 인구가 계속 줄어들다 보니 이런 혜택이 생긴 모양이었다. ‘농촌 지역가입자’를 선택했더니 직장 다닐 때보다 오히려 건보료가 절반 가량 줄었다.”
–그 밖에 퇴직자가 챙겨야 할 혜택은?
“직장인은 고용불안 사태에 대비하여 ‘고용보험료’라는 돈을 근로복지공단에 낸다. 고용보험이란,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거나 구조조정을 당해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이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일정 기간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사회보장제도다.
실업급여는 실직자가 고용보험에 가입한 기간 및 이직 당시 나이에 따라 120~270일간 지급된다. 지급 금액은 이전 직장에서 받던 평균임금의 60% 수준으로, 성인 근로자라면 대략 130만~180만원 정도다. 그런데 정년 퇴직을 한 사람도 이 혜택을 챙길 수 있다. 예전엔 60세가 넘어 은퇴한 정년 퇴직자는 대상이 아니었으나, 최근 ‘고용보험료’를 낸 모든 근로자로 대상이 확대됐다.
고용보험에 가입했는지는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 또는 고용노동부 ‘고용24′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이트에서 가입이력 증명서를 발급 받아 집 근처에 있는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방문해 제출하면 실업급여 수급 절차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