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비트코인에 이어 이더리움 현물 상장지수펀드(ETF)가 시장에 등장했다. 국내 자산운용사들도 언젠가 다가올 우리 금융당국의 가상자산 ETF 승인에 대응하고자 내부적으로 준비에 나서는 분위기다. 상품 출시까지는 법 개정 등 갈 길이 멀지만,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 규모도 투자자 관심도 날로 커지고 있는 만큼 한국 정부가 이 흐름을 마냥 외면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에서다.

다만 우리 금융당국 입장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비효율적 자원 배분, 주식시장 침체 등 리스크도 클 것으로 예상돼 가상자산 현물 ETF의 실제 출시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 DB

◇ 비트코인 전문가 초빙 강연 열고 모니터링 강화

2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한 대형 운용사 상품개발부서는 최근 비트코인 전문가를 초빙해 사내 강연을 진행했다. 이 운용사 관계자는 “당국 허가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아 구체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제도가 완성되고 상품 개발 수요가 파악되면 빠르게 경쟁해야 하기에 미리 필요한 공부를 한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운용사는 올해 들어 가상자산 기반의 현·선물 인덱스 펀드와 자산배분형 펀드 관련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지난 1월 비트코인 현물 ETF를 승인한 데 이어 이달에는 이더리움 ETF까지 승인한 여파로 풀이된다. 시장에서는 비트코인과 달리 이더리움 현물 ETF는 승인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SEC는 올해 5월 블랙록·피델리티·그레이스케일 등 8개 운용사가 제출한 상장 심사요청서를 승인한 데 이어 2개월 만에 거래를 최종 허가했다.

한 대형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미국이 승인했다고 해서 한국도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2021년 캐나다를 시작으로 미국·영국·홍콩·독일·브라질 등이 비트코인 현물 ETF를 선보였고 그 흐름은 이제 이더리움으로 확산하고 있다”며 “가상자산의 제도권 편입이 예고된 수순이라면 현물 ETF 출시도 다가올 미래이기에 운용업계도 각자 방식대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업계에서는 금융당국이 언젠가 가상자산 현물 ETF 거래를 허용하면 미래에셋운용과 삼성자산운용이 가장 먼저 상품을 낼 것이란 말이 나온다. 미래에셋운용은 미국 ETF 운용 자회사인 글로벌X를 통해 비트코인 가격 흐름을 추종하는 ETF를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삼성자산운용은 홍콩에서 비트코인 선물 액티브 ETF를 운용하고 있어서다.

비슷한 상품을 이미 시장에 내놓고 굴려온 경험이 있는 만큼 두 회사의 대응 속도가 가장 빠를 것이란 관측이다. 운용자산(AUM) 기준 10위권에 속하는 한 중형 운용사 관계자는 “가상자산 현물 ETF에 대해서는 상당수 운용사가 시장 주도 사업자를 빠르게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손민균

◇ 유보적인 당국 “증시 자금 유출, 경제적 편익 불분명”

다만 가상자산 현물 ETF를 바라보는 한국 정부의 시각이 다소 유보적이어서 실제 상품 출시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김병환 금융위원장 후보자는 지난 22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여부를 묻는 말에 “금융시장 안정, 금융기관에 미치는 영향 등을 살피고 국회와 논의하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드러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ETF의 기초자산은 금융투자 상품, 국내외 통화, 농산물·축산물·수산물·임산물·광산물·에너지 등 일반 상품이다. 이 명단에 가상자산을 넣으려면 법을 개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이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설지는 미지수다. 정부 관계자는 “가상자산 현물 ETF가 등장하면 주식시장의 유동성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며 “이는 밸류업(가치 제고) 정책 기조에 배치되는 거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법 개정이 필요없다는 의견도 있다. 엘살바도르는 지난 2021년 비트코인을 법정 통화로 채택했다. 실질적으로 통화로 쓰이지는 않지만, 금융위가 통화의 범위를 폭넓게 해석하면 법적으로 ETF 출시는 문제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부는 학계·연구계에서 제기하는 부작용도 신중히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장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가상자산 현물 ETF의 리스크’ 보고서를 통해 “기업이 주식·회사채 등 유가증권을 발행해 조달한 자금은 투자·연구개발(R&D) 등에 활용되면서 실물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며 “반면 가상자산은 채굴이나 발행을 통해 산출하는 경제적 편익이 불분명하거나 크지 않다”고 했다.

가상자산 시장의 높은 변동성이 금융 시스템 전반의 불안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점도 정부를 망설이게 하는 포인트다. 예컨대 가상자산 가격 급락으로 ETF 환매가 급증하면 가상자산 현물의 대량 매도가 발생하고, 이는 다시 가격 추가 하락을 부추길 수 있다. 장 연구위원은 “이 과정에서 유동성 공급자(LP)의 헤지(hedge·위험 회피) 실패로 시장 패닉이 발생하거나 LP가 대규모 손실과 유동성 부족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