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이 통화 정책을 결정하는 31일 오후, 일본은행 홈페이지가 일시적으로 마비됐다. 이날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어떤 결정이 나올지 궁금해진 전세계 시장 관계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닛케이신문은 이날 “금융정책 결과를 알리는 중요한 플랫폼인 일본은행 홈페이지가 회의 당일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해제하는 지난 3월 정책회의 때엔 없었던 현상”이라고 밝혔다. 일본은행의 홈페이지 마비 해프닝은 이날 발표될 통화 정책이 얼마나 세계 금융 시장의 관심사였는지 실감케 한다.

31일 오후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 결과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일본은행 홈페이지가 일시적으로 마비됐다./BOJ 캡처

✅보통예금 금리 넉달새 100배로

이날 일본은행은 종전 연 0~0.1%였던 정책금리를 0.25%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지난 2008년 12월 이후 15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발표는 즉각 현지 금융 생태계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3대 메가뱅크(미츠비시UFJ, 미츠이스미토모, 미즈호)들이 보통예금 금리를 현재 0.02%에서 0.1%로 8~9월 중 인상하겠다고 일제히 발표했다. 0.1%는 16년 만의 최고 금리로, 지난 3월 마이너스금리 해제 이전의 연 0.001%에서 넉 달 만에 100배로 상승했다. 3대 메가뱅크에 뒤이어 중소·지방은행들의 예적금 금리 인상 행진도 이어질 전망이다.

일본 최대 은행인 미츠비시UFJ은행은 이날 변동금리형 주택 대출 금리의 기준이 되는 단기 프라임레이트(최우대 금리)도 9월부터 1.475%에서 1.625%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단기 프라임레이트 인상은 지난 2007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이번 조정에 따라 변동금리형 대출을 받은 소비자들은 17년여 만에 대출 이자 상환 부담이 늘어날 전망이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은퇴자들에겐 반가운 금리 인상

일본은 장기간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 이어지면서 가계가 부(富)를 늘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가계 이자 수입은 연 39조엔이었는데, 초저금리가 이어지면서 지난 2022년에는 연간 6조엔으로 80% 감소했다.

하지만 이날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으로 이른바 ‘금리 있는 세계(金利ある世界)’가 열리면서 일본 가계는 적잖은 수혜를 누릴 전망이다. 일본은 작년 말 기준 가계 금융자산이 2141조엔(1경9534조원)에 달한다. 부동산 비중이 64%로 높은 한국 가계와 달리, 일본 가계는 금융자산 비중이 63%로 가장 높다.

일본 가계 전체 금융자산 중에서 약 650조엔은 보통예금처럼 현금화하기 쉬운 금융 상품에서 잠자고 있다. 일본 민간 은행들은 보통예금 금리를 연 0.1%로 인상할 예정인데, 결국 보통예금 이자 수입으로만 6500억엔(약 6조원)이 생겨서 소비 여력이 한층 높아지게 된다. 일본은 예적금 등 금융자산의 60%를 60대 이상 고령층이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번 금리 인상은 특히 고령층에 축복이 될 전망이다.

플라자합의(1985년)는 미국이 달러 가치를 하락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 화폐들(특히 일본 엔화)의 가치를 올리도록 한 것(평가 절상)이다./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엔캐리 청산 ‘머니무브’ 일어나나

이날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으로 엔(円)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엔캐리 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돈을 빌려 금리가 높은 나라에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 엔화는 환율 변동성이 제한적이어서 미국 월가에서 가장 선호하던 유동성 공급 통화였다.

토시마이츠오(豊島逸夫) 토시마어소시에이츠 대표는 “일본은행의 통화 정책 발표를 멀리서 숨죽이며 지켜본 사람들은 단기 투자 전문인 헤지펀드 매니저와 그 고객들일 것”이라며 “엔화 강세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미국 빅테크 주식들이 요동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엔캐리가 아니고서는 시총 3조달러(약 4132조원)가 넘는 엔비디아의 이상 급등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은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멕시코·호주 등으로 향했지만, 엔비디아를 비롯한 미국 빅테크 주식에도 상당수 흘러 들어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은 20조달러(2경7500조원)에 달한다. 엔캐리 자금 일부는 한국에도 유입됐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일본인들의 국내 상장 주식 보유액은 16조2910억원이었다. 작년 말 대비 8% 늘어나는 등 꾸준한 증가 추세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전문가들은 연말로 갈수록 엔화 수요가 늘어나면서 엔화 절상 압력이 예상보다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점친다. 엔화 강세 압력으로 엔캐리 자금이 본국으로 급격히 돌아간다면,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신윤정 교보증권 연구원은 “엔저로 수입 물가가 높아져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일본 정부 입장이 바뀌고 있고 미국 금리 인하로 달러 약세가 진행되면 엔화 절상 추세가 더욱 강해질 것”이라며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에 더불어 일본 공적연금(GPIF)의 일본 주식 비중 확대 움직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신 연구원은 이어 “국내 증시는 외국인 수급이 중심인데, 과거에도 엔캐리 청산 구간에는 외국인 매수 자금 유입이 줄어 주가 상승이 쉽지 않았다”며 “엔캐리 청산 속도가 지난 1998년이나 2008년처럼 빠르게 진행된다면 증시의 큰 폭의 하락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