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인 극장에서 누군가 ‘불이야’ 외쳤을 때와 같은 광경이다. 시장 참여자들이 모두 한 번에 시장에서 돈을 빼려고 아우성쳤고, 매도가 매도를 불렀다.”(이데신고 닛세이기초연구소 주식전략가)
5일 미국발 리세션(경기 둔화) 우려로 일본 증시가 폭락 마감하자, 투자자들 사이에서 ‘계좌가 녹았다’는 비명이 이어졌다. 이날 일본 증시에서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평균은 4451엔(12.4%) 하락한 3만1458엔에 마감했다. 지난 1987년 10월의 블랙먼데이(3836엔 하락)를 뛰어넘는 역대 최대 하락 폭이다. 1987년 블랙먼데이는 뉴욕 증시 개장 후 대량의 팔자 주문이 쏟아져 다우평균이 하루에 22.6% 폭락한 사건을 말한다.
닛케이신문은 이날 “해외 기관, 헤지펀드, 개인 등 시장 참가자 모두가 패닉셀(투매)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날 오후 일본 증시는 닛케이 선물 지수 하락으로 하루에 두 차례나 서킷브레이커(거래 일시 중지)가 발동됐다. 닛케이 선물 서킷브레이커 발동은 지난 2016년 6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처음이다.
✅바이재팬이 악몽으로
일본 증시는 올해 상반기(1~6월)에만 18%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천장 뚫린 듯 역사적 고점을 연일 경신하자, 한국에서도 ‘바이재팬 붐’이 불었다. 한국인들의 일본 주식 보관액은 계속 늘어나 이달에는 43억달러(약 5조9000억원)에 달했다. 닛케이평균에 연동하는 주가연계증권(ELS) 발행액은 11조원 규모로 커졌고, 일본 펀드에도 1400억원가량 자금이 유입됐다.
하지만 지난달 최고점(42426엔)을 찍은 닛케이평균은 한 달 만에 26% 하락하며 올해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다. 뒤늦게 ‘바이재팬 붐’에 올라탄 투자자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증시 변동률의 2배로 움직이는 일본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는 이날 하루에만 25% 빠졌다.
이날 일본 시가총액 1위인 도요타도 전날 대비 13.7% 하락한 2232엔에 장을 마쳤다. 올해 도요타 주주가 됐다는 황모씨는 “수퍼 엔저라고 해서 수출주인 도요타를 샀는데, 돌연 엔고로 방향이 바뀌니 수출주가 붕괴하고 있다”고 말했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최근 한 달 동안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9.5% 상승해 주요국 중 상승률 1위였다. 엔화 가치가 상승(엔·달러 환율 하락)하면 제품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주 실적엔 불리하다. 이날 엔·달러 환율은 한때 141엔대까지 떨어졌는데, 이는 지난 1월 이후 7개월 만이다.
박소연 신영증권 이사는 “일본 증시가 사흘간 20% 폭락하면서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이 대내외적으로 정책 실패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며 “추후 금융 당국의 정책 발표를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 8월에도 일본 BOJ가 0.25%포인트 금리 인상을 한 후 시장이 폭락하자, 다시 금리를 0%로 되돌린 전례가 있다는 것이다.
✅안전 자산으로 머니무브
안전자산으로 돈이 옮겨 가는 ‘머니무브’ 현상도 동시에 일어났다. 이날 국고채 금리가 급락(채권 가격 상승)하면서 채권이 강세였고, 위험 자산인 비트코인 가격은 폭락했다.
이날 서울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연 2.806%에 장을 마쳤다. 10년물 금리도 하락해 연 2.878%에 마감했다. 채권 금리가 내려가면 채권 가격은 상승해 가치가 높아진다는 걸 뜻한다. 3년물과 10년물 국고채 금리 모두 미국발 경기 침체 우려가 불거진 지난 2일부터 연저점을 갱신하고 있다. 특히 10년물 국고채 금리는 지난 2일 연 2%대로 내려왔는데, 이는 2022년 3월 이후 약 2년 4개월 만이다.
미국발 리세션 우려로 안전 자산에 돈이 몰려간 데다, 연방준비제도의 9월 ‘빅컷(기준금리 0.5%포인트 인하)’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국내 채권 시장에서도 연준이 빅컷에 나설 경우 한국은행 역시 기준 금리 인하에 속도를 낼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
반면, 위험 자산의 대표 주자인 가상 화폐는 ‘패닉셀’이 이어지며 가격이 추락했다. 이날 오후 3시 기준 국내 가상 자산 거래 플랫폼인 업비트에서 비트코인은 전날 대비 10% 떨어진 5만1950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비트코인이 5만1000달러대까지 떨어진 것은 지난 2월 이후 처음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기대가 높아지면서 지난달 중순 비트코인 가격은 계속 올랐고, 지난 달엔 7만달러 선을 터치했는데 곤두박질쳤다. 다른 가상 자산도 상황이 비슷하다. 이더리움은 전날보다 약 12.8% 떨어진 2267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이 역시 올해 2월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해 상승 폭을 전부 되돌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