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조작으로 상장사 주가순자산비율(PBR)을 1배 미만으로 떨어뜨려 소액 주주의 이익을 해치는 대주주를 처벌해 주십시오.”

지난 9일 ‘PBR 1배 미만 상장사에 대한 처벌 강화’라는 제목의 국민동의청원이 등장했다. PBR이란, 주가를 장부 가치로 나눈 것이다. PBR이 1배 미만이면 회사가 보유 자산을 전부 매각하고 사업을 접을 때보다도 지금 주가가 싸다는 의미다.

청원인 김모씨는 청원 취지에서 “한국 증시에는 상속 등의 이유로 일부러 기업 가치를 떨어뜨리는 기업들이 많다”면서 “상장할 때는 장밋빛 전망을 내세워 일반 국민들을 우롱하고, 상장 후 실적이 안 좋으면 유상증자나 전환사채를 남발하고, 실적이 좋아도 소액 주주에게 이익을 나눠 주지 않고 부동산 투자나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이어 “일반 국민의 등에 빨대를 꽂아서 고혈을 빨아 먹는 기생충을 옹호하는 정부 또는 국회가 되지 않으려면, 상장사 악덕 대주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픽=김성규

✅국민 청원에까지 등장한 ‘PBR 1배’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개선) 프로그램에 본격 시동이 걸린 가운데, 투자자들 사이에서 PBR이 뜨거운 키워드로 떠올랐다. PBR이 1배가 안 되면서 주가도 지지부진한 못난이 기업들의 주주들이 중심이 되어 뭉치는 분위기다. PBR 1배 미만이면 현재 주가가 기업의 자산 가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여서, 재산상 평가 손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PBR 1배 이상’은 34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일본 증시의 주가 부양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작년 4월 도쿄증권거래소는 PBR 1배를 밑도는 상장사들을 대상으로 자본 효율을 개선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홈페이지에 공개하라고 통지했다. 500개 주요 상장사 중에 PBR이 1배도 되지 않는 기업이 전체의 43%에 달할 정도로 저평가가 심각한 상황에서 꺼낸 비장의 카드였다.

도쿄증권거래소 이와나가모리유키(岩永守幸)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PBR 1배라는 알기 쉬운 목표를 제시해 분위기를 환기시킨 전략이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도쿄거래소가 처음 PBR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상장기업 대표들조차 ‘PBR이 뭐냐’고 반문할 정도로 주식 시장 이해도가 낮았다고 한다. 하지만 ‘PBR 1배 미만은 주식 열등생’을 꾸준히 알려나가자, 상장사 오너들의 인식도 바뀌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그렇다면 일본에선 주로 어떤 기업들이 헐값에 거래되고 있었을까. 작년 여름 노무라자산운용이 도쿄 프라임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저(低)PBR 기업 200곳을 뽑아 봤더니, 전체의 58%가 은행·증권·보험과 같은 금융주였다(나머지는 제조업 25%, 비제조업 17%).

사카이테츠지(阪井徹史) 노무라운용 수석 전략가는 “일본 증시에서 PBR이 매우 낮은 기업에 투자한다는 의미는 포트폴리오의 절반 이상을 금융주에 투자한다는 것”이라며 “일본 증시 전체에서 금융주가 차지하는 비중(시가총액 기준)이 약 10%라는 점을 고려하면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만년 저평가 딱지 떼어낸 日 금융주

스위스 픽테자산운용에 따르면, 작년 7월만 해도 일본 은행들의 평균 PBR은 전체 업종 중 최하위인 0.3배에 불과했다. 시장 금리가 오랜 기간 하락한 탓에 은행들이 수익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년 저평가의 대명사였던 일본 금융주가 올해는 180도 달라졌다. 총자산 397조엔(약 3694조원)을 보유한 일본 최대 은행인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은 지난 3월 PBR 1배를 돌파했다. PBR 1배 돌파는 지난 2009년 8월 이후 14년 6개월 만에 처음이다. 뒤이어 3대 메가뱅크 중 하나인 미쓰이스미토모파이낸셜그룹도 지난 달 PBR 1배를 뚫었다. 역시 지난 2013년 1월 이후 처음이다.

물론 일본 3대 메가뱅크 중 2곳이 올해 PBR 1배를 돌파하는 등 나름 성과는 거뒀지만, 미국 대형 은행들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작년 말 기준 미국 초대형 은행인 JP모건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16.9%에 달했고, PBR은 1.8배였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PBR 1배 금융회사, 메리츠지주 유일

한국 증시의 금융회사들의 PBR 상황은 어떨까. 13일 미래에셋증권 퀀트 분석에 따르면, 현재 상장되어 거래되는 29개 금융지주·증권사 중 작년 기준 PBR 1배를 넘는 곳은 메리츠금융지주가 유일하다<아래표 참고>. 메리츠금융지주는 지난 2017년부터 작년까지 매입한 자사주 5602억원을 전략 소각해 ‘자사주 소각률 100%’를 유지하는 등 적극적인 주주 환원책을 펼치고 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메리츠금융은 은행이 없으면서도 올해 시총이 16조원까지 불어나서 하나금융(시총 17조5700억원)을 바짝 쫓고 있고, 우리금융(시총 11조)보다는 시총이 45%나 크다”면서 “꾸준한 자사주 소각으로 주식 수를 줄이고 주주 현금 배당을 하는 등 효율적인 자본 배치를 통해 PBR을 1배 이상으로 높였다”고 평가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금융주들이 올해 주가가 꽤 많이 올랐는데도 아직 대부분은 PBR이 0.5배에 못 미치고 있다”면서 “PBR이 높아졌다고 해도 이유를 뜯어 보면 주가(분자)가 올라서이고, 이익(분모)이 큰 폭으로 증가해서는 아닌 만큼, 향후 더 많은 기업들의 밸류업 관련 공시와 수급 개선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 금융지주사들이 PBR 1배를 기록했던 시절이 있긴 하는 걸까. 일본 은행들처럼 PBR 1배 깜짝 돌파를 기대해도 되는지 궁금하다. 13일 한국거래소에 의뢰해 국내 8개 금융지주사가 PBR 1배에 거래되었던 시기를 조사해 봤다. 그랬더니, 신한지주(2012년 4월), KB금융(2011년 8월), 기업은행(2011년 8월), 하나금융지주(2011년 4월), BNK금융지주(2014년 9월), DGB금융지주(2012년 4월) 등으로 조사됐다. 우리금융지주는 지난 2019년 지주사로 재출범한 이후 아직 PBR 1배를 찍은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