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3개월가량 흘렀다. 하지만 이 정책의 핵심인 밸류업 자율공시 참여율은 0.3%에 불과한 실정이다.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소각 규모를 전년보다 늘리는 등 주주환원을 강화하면서도 밸류업 공시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밸류업 정책의 성패를 좌우할 세제 혜택이 거대 야당 장벽에 가로막힐 수 있고, 경기 여건도 녹록지 않아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8월 12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기업밸류업을 위한 상장기업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뉴스1

◇ 석 달 동안 밸류업 자율공시 참여율 0.3%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기준 국내 상장회사 수는 유가증권시장 844개사, 코스닥시장 1743개사 등 총 2587개사다. 이 가운데 밸류업 계획을 자율공시한 기업은 키움증권, 에프앤가이드, 콜마홀딩스, 메리츠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신한지주, DB하이텍 등 7곳이다.

연초 금융당국이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 계획을 공개하고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 5월 27일부터 자율공시를 시작했으나, 석 달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참여율이 0.3%에 그친 것이다. 밸류업 자율공시를 하겠다고 예고(안내공시)한 상장사 8곳을 합쳐도 참여율은 0.6% 수준이다.

고위 당국자들은 연일 밸류업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이달 8일 “상장사 CEO(최고경영자) 혹은 대주주께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거래소 중심으로 진행되는 밸류업 자율공시에 적극 참여해달라”고 했다. 나흘 후인 12일에는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기업 밸류업의 핵심적인 성공 요인은 시장 참여자의 자발적·적극적인 참여”라며 자율공시 동참을 촉구했다.

그러나 상장사들은 자율공시는커녕 앞으로 밸류업 계획을 내놓겠다는 안내공시조차 외면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밸류업 정책을 벤치마킹한 일본에서는 밸류업 프로그램이 도입되고 4개월 동안 10% 넘는 상장사가 공시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K-밸류업은 초반 흥행에 실패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기업에 주주친화 경영 의지가 없는 건 아니다. 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상장사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2조2000억원으로, 1조8000억원을 기록한 전년 동기 대비 22% 증가했다. 올해 기업의 자사주 소각도 8월 현재까지 9조원에 근접하고 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자사주 소각 규모는 약 2조원에 불과했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면 발행 주식 수가 줄면서 주당 가치는 올라간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6월 26일 서울 마포구 상장회사회관에서 열린 기업 밸류업을 위한 지배구조 개선 세미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뉴스1

◇ 밸류업 세제 혜택 불확실성에 망설이는 기업들

다만 기업들은 미국발(發) 경기 침체 우려 등 사업을 둘러싼 거시 여건이 녹록지 않아 밸류업 공시도 서두르지 않는 분위기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밸류업이 중장기 계획인 만큼 이사회 등과 신중하게 논의하고 있다”며 “꽤 많은 상장사가 내년도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4분기쯤 (밸류업 계획을) 발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밸류업 정책의 성패를 결정할 세제 혜택이 거대 야당에 가로막혀 좌초될 수 있다는 점도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25일 발표한 ‘2024년 세법 개정안’에서 밸류업 자율공시를 이행하고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으로 주주환원을 늘린 코스피·코스닥 상장사의 법인세를 감면하겠다고 했다. 직전 3년 평균 대비 주주환원 증가액 중 5% 초과분에 대해 5%의 세액공제가 적용된다.

개인 주주에게도 세제 혜택을 준다. 현행법은 금융소득(이자·배당소득)이 연 2000만원 이하면 14% 원천세율을 적용한다. 2000만원이 넘으면 최고 45%의 누진세율이 적용되는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이다. 그러나 정부는 주주환원을 늘린 밸류업 기업의 개인 주주에 대해 다음 연도에 받을 현금배당액 중 일부를 저율로 분리과세할 방침이다. 분리과세 금액에 대해 분리과세자는 9% 단일세율을, 종합과세자는 최고 25% 누진세율을 부과한다. 분리과세 금액을 뺀 나머지 배당금에만 종전 세율을 부과한다.

문제는 국회 통과의 열쇠를 쥔 더불어민주당이 이 개정안에 부정적이란 점이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기업 내부의 투명성을 높여 ‘1인 지배’라는 후진적 지배구조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는 이런 현실은 덮어둔 채 대주주 특혜 감세를 밸류업 프로젝트로 내밀었다”면서 “주주환원 촉진세제라며 내놓은 법인세·배당소득세 감면 등의 세법 개정안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일러스트=손민균

◇ “밸류업은 중장기 관점에서 접근해야”

정부는 상장사 유인책을 지속해서 마련하고 있는 만큼 밸류업 참여 기업도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거래소는 9월 중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확정해 발표한다. 수익성, 자본효율성, 주주환원 성과 등을 토대로 편입 종목을 선정할 예정이다. 4분기에는 이와 연계한 밸류업 상장지수펀드(ETF)도 출시한다. 통상 새 지수와 이를 추종하는 ETF가 등장하면 기관·외국인 자금이 유입돼 편입 종목 주가는 상승 탄력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일관되고 꾸준한 추진력으로 밸류업 정책에 성공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최근 발간한 ‘일본 자본시장 개혁의 성과 동인 및 시사점’ 보고서에서 “일본은 지난 10여년 동안 아베노믹스 정책, 기업 지배구조 개혁, 거래소 시장 개편 등을 한결같이 추진해왔다”고 했다.

노동길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불확실성은 앞으로도 있겠지만, 밸류업 프로그램에 과도하게 실망하거나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며 “민간 기업은 이미 정부와 유관기관 방침에 발맞춰 주주환원을 개선하고 있다”고 했다. 노 연구원은 “밸류업 프로그램은 중장기 관점에서 정책 시행의 정당성을 가진다”라며 “주주환원 제고와 법안을 통한 지원 체계 마련은 세부 전략 중 하나일 뿐 목적 자체로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