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PBR을 1배로 높여서 주가가 간신히 청산 가치는 넘어섰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앞으로 PBR을 얼마까지 높일 것인지 목표를 알려 주세요.”(세이카산업 소액주주 A씨)
“(다른 회사들처럼)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면 PBR 1배는 쉽게 달성할 수 있잖아요. 왜 이렇게 PBR이 낮은 건지 해명해 주세요.”(일본제철 소액주주 B씨)
올해 6월 열린 일본 상장사들의 주주 총회는 그야말로 ‘PBR총회’나 다름 없었다. PBR이란, 주가를 장부 가치로 나눈 것이다. PBR 1배 미만이면 회사가 보유 자산을 전부 매각하고 사업을 접을 때보다도 현재 주가가 싸다는 의미다. 저평가 종목을 보유한 일본 소액 주주들은 “왜 PBR 1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느냐”고 송곳 질문을 던졌고, 경영진은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올해 일본에서 벌어진 주주총회 풍경은 내년에 열릴 한국 상장사들의 주총 미리보기판”이라며 “한국이 추진 중인 밸류업(기업가치개선) 프로그램이 연말에 본격 가동하면 내년 주총장에선 PBR 개선과 관련된 주주 질의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PBR 부양 의지와 주가의 상관 관계
‘PBR 1배’는 2024년 일본 증시를 역대 최대 강세장으로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해 ‘PBR 1배 미만 회사는 주식 열등생’이라고 알리면서 ‘PBR을 1배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을 공시하라’고 각 상장사에 요청했다.
당시 일본 증시는 500개 주요 상장사 중 PBR 1배 미만인 기업이 전체의 43%에 달할 정도로 저평가가 심각했다. 도쿄거래소의 요청은 선택 사항이었지만, 경영진이 주가 저평가 상태에 대해 의식하는 계기가 됐다.
저PBR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한 기업은 주가도 위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3월기 결산 보고서에서 낮은 PBR 개선 의지를 언급한 상장사는 모두 44곳이었다. 1년 후 이들 기업 43곳(자진상장폐지 1사 제외)의 주가는 29% 상승했다. 같은 기간 일본 대표지수인 닛케이평균의 상승률을 11%포인트 웃돌았다.
일본 닛케이신문은 지난 달 “PBR 1배 미만이면서 개선책을 밝히지 않는 기업에는 대표 선임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선언한 기관도 등장했다”면서 “기관 투자자들은 PBR 등 지표와 회사 정책을 엄격하게 살피면서 주주총회 의결권을 행사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스콘 앤더슨 라자드재팬운용의 스콧 앤더스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닛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업의 근본 가치를 높이는 것은 경영자의 기본 책임”이라며 “단순한 주주환원 차원이 아니라, 자본 활용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려갈 것”이라고 밝혔다.
✅韓 10대 그룹 PBR 현황 봤더니
일본 증시 부양책을 벤치마킹한 한국판 밸류업(기업 가치 상승) 프로그램은 연말 본격 가동을 앞두고 있다. 지난 22일엔 한국거래소 주최로 ‘기업 밸류업을 위한 10대 그룹 간담회’도 열렸다. 이 자리에는 10대 그룹의 재무담당 임원들이 참석했는데, 삼성, SK, LG, 포스코, 롯데, 한화, GS, HD현대, 신세계 등이다(현대차는 불참). 밸류업과 관련해 거래소가 10대 그룹 재무 담당 임원과 간담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한국 증시의 든든한 버팀목인 10대 그룹부터 밸류업 프로그램에 선도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간담회 참석 임원들은 “그룹 차원에서 주주·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화답했다.
일본에서도 저(低)PBR 개선은 주로 시가총액 1000억엔(약 9200억원) 이상인 대형주들이 앞장섰고 이후 중소형주로 온기가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밸류업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밝힌 한국의 10대 그룹 주가는 현재 어떤 상황일까.
26일 한국거래소에 의뢰해 2023년 사업보고서를 토대로 이들 10대 그룹(소속 상장사 전체)의 PBR을 살펴 봤다. 그랬더니 PBR 1배 이상인 그룹은 HD현대, 삼성, LG 등 3곳에 불과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대다수 기업들의 PBR이 평균 1 미만이고 심지어 시장 평균(작년 말 0.96배)보다도 낮다”면서 “지표상 자본비용(ROE)이 10%보다 높은 그룹이 현대차 밖에 없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자기자본을 과다하게 보유한 상태에서 이익창출 능력마저 떨어지는 기업들의 현 상황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PBR 1배 이상인 그룹 3곳뿐
10대 그룹 중 PBR이 가장 높은 곳은 HD현대(1.27배)였다. HD현대의 PBR은 올해 더 높아질 전망이다. HD현대일렉트릭, HD현대중공업, HD한국조선해양 등 그룹 내 개별 기업들의 영업 이익이 급증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변압기 업체인 HD현대일렉은 수출 호조로 올해 주가가 290% 상승하면서 코스피 상장사 중 압도적인 1위를 기록 중이다. 지난 5월에는 HD현대마린솔루션이 상장하면서 그룹 위상에 힘을 보탰다.
시가총액 40조원대인 한화그룹은 올해 129% 상승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우량 기업이 많이 포진해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현재 시가총액이 약 14조원인데, 모(母)회사 한화가 지분 34%를 보유하고 있다. 지분 가치만 5조원에 육박하지만, 현재 한화 시가총액은 2조2600억원이다.
오너 일가가 봐도 싸다고 생각했는지,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이 지분 100%를 보유한 한화에너지가 지난 7월 한화 주식 8% 공개 매수에 나서기도 했다(공개매수가 3만원, 주주들이 응하지 않아 5.2%만 확보). 지난 24일엔 김승연 회장의 3남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이 주식담보대출을 받아 544억원 어치 한화갤러리아 지분을 사들이겠다고 해서 화제였는데, 한화갤러리아의 PBR은 0.32배다.
한편, PBR이 낮은 최하위 3인방은 GS그룹, 롯데그룹, 신세계그룹이었다. 특히 신세계그룹은 광주신세계, 신세계, 신세계I&C, 신세계건설,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푸드, 이마트 등 7개 코스피 상장사가 모조리 PBR 1배 미만이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낮은 PBR은 단순히 주가가 싸다는 의미를 넘어 회사가 자기자본으로 수익을 잘 내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낮은 ROE)도 포함한다”면 “한국 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은 미국의 절반 수준이기 때문에 단순 저평가라는 접근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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