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전세자금대출 규제 손질에 속속 나서고 있다. 금융 당국이 실수요자 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을 주문한 데 따른 조치다. 은행은 당국의 요구 사항인 만큼 수용은 하나, 난감하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투기와 실수요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어디까지를 갭투자(전세를 낀 주택 매수)로 볼지도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지난 3일 ‘임대인 소유권 이전’ 등의 조건부 전세자금대출을 중단한 지 하루 만에 재개를 결정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실수요자에 대한 대출 공급이 차질 없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전날(4일) 규제를 완화했다”며 “주택 매매 잔금 지급일이 11월 이후인 임대인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은 11월 1일부터 상담 및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조건부 전세대출은 임대인의 소유권 이전 등 조건이 붙은 대출을 뜻한다. 임대인은 분양 대금 완납일과 임차인의 전세대출 실행일을 같은 날로 맞춰, 이 전세금으로 잔금을 치러 소유권을 확보한다. 문제는 은행들이 속속 조건부 전세대출을 중단하면서, 신규 주택을 분양받은 후 전세금을 끌어다 쓸 계획을 세웠던 이들의 자금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점이다. 분양자들 사이에선 “투기 목적이 아닌데 왜 전세대출을 막는 것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자 대출 옥죄기를 연일 강조하던 금융 당국이 “실수요자 피해는 막아야 한다”며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 4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은행이 실수요자 전세대출까지 막고 있다’는 정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적에 “실수요자에 대한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관리해 나가겠다”고 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실제 투기 목적이 아닌 경우가 있을 텐데 너무 기계적이고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건 (실수요자에게) 어려움이 있다”며 “국민께 불편을 드린 것에 대해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사과드린다”고 했다.
시중은행 중 가장 강력하게 조건부 전세대출을 막고 있는 곳은 우리은행이다. 우리은행은 지난 2일부터 모든 유형의 조건부 전세대출을 중단했다. 우리은행은 1주택자 전세대출도 오는 9일부터 중단해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아직 내부적으로 공식적인 대책이 나온 것은 없다”는 입장이나, 대출 규제 손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밖에 NH농협은행도 오는 6일부터 모든 조건부 전세대출을 중단하나, 임대인이 분양금을 100% 완납하면 해당 주택에 대한 전세대출을 허용하기로 했다. 신한은행은 조건부 전세대출을 중단했으나, 신규 분양 주택 소유권 이전 조건의 대출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소유권 이전이 돼 있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신규 분양 주택에 전매 제한이 걸려있어, 갭투자에 활용될 여지가 적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현재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되는 서울 강남 3구·용산구 소재 주택의 전매 제한 기간은 최대 3년이며, 이 밖의 비규제 지역은 1년이다.
다만 은행권에선 조건부 전세대출의 경우 투기 세력과 실수요자를 어떤 기준으로 나눠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은행 관계자는 “신규 분양 주택이라 하더라도 입주도 안 하고 세입자를 구하는 게 결국 갭투자 아니냐”라며 “어디까지가 갭투자고, 어디까지가 실수요 목적인지 모호한 측면이 크다”고 했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을 도입한 이유가 갚을 수 있는 만큼만 돈을 빌려 집을 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라며 “시세 차익을 기대하며 중도금은 대출로 일단 막고 잔금은 전세금으로 메우는 행위가 이 목적에 맞다고 보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