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쇠, 가난, 질병, 고독, 돌봄, 상실...
‘노년’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단어들이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워질수록 인생은 우울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고령자들이 하루 종일 우울과 슬픔 속에 살아서 인생 만족도가 낮을 것이라는 건 착각이다. 오히려 인생 말년에 젊은이들 수준 못잖게 주관적인 행복감이 높아지는 노인들이 많다.
최근 일본 생활용품 업체 카오(花王)가 75세 이상 남녀 111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58%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답했다. 노인 10명 중 6명은 인생 후반전을 ‘짐’이 아니라 ‘선물’처럼 받아들이며 즐기고 있었다.
신체는 쇠약해지는데 행복도는 오히려 높아지는 ‘노화의 역설’은 왜 나타나는 걸까? 과학잡지 뉴턴(2023년)의 분석을 토대로 노년기에 삶의 만족도가 더 높아지는 이유에 대해 알아봤다.
✅나이 들수록 긍정적으로 변한다
인간의 뇌는 칭찬보다는 욕설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를 테면 칭찬 세례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도 날카로운 말 한 마디에는 큰 상처를 받는다. 비판이나 부정적인 사건은 긍정적인 사건보다 더 강하게 기억에 오래 남고, 감정적으로도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성 편향(negative bias)’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노인들은 젊은이에 비해 부정적인 정보보다는 긍정적인 정보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른바 ‘긍정성 효과(positivity effect)’다. 노년기에는 단어나 표정, 그림 등 각종 정보를 처리할 때도 긍정적인 것을 선호하고 중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여러 사진들을 보여주고 어떤 사진이 기억에 남는지 조사했더니, 65세 이상 고령자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긍정적인 내용의 사진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긍정적인 정보를 자주 접하거나 긍정적인 경험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나가면,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어 긍정적인 감정은 더 공고해진다.
인생에 남은 시간이 적기 때문에 긍정성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란 분석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위험이나 고난을 사전에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본인 감정의 충족을 더 우선시하게 되고, 그렇게 여생을 보내려는 심리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30~40대에 정점 찍고 내리막
고령자들의 주된 특징인 긍정성 효과는 일상 생활의 스트레스 수준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래 그림은 일본의 건강관리업체인 닥터트러스트가 10~70대 남녀 32만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스트레스 지수 추이다. 결과를 보면 전 연령대 중에서 30대가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고 있으며, 나이가 들수록 스트레스 지수는 점차 줄어들고 70대엔 스트레스가 매우 낮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와 있다. 질병관리청의 연령대별 스트레스 인지율 조사를 보면, 한국에서는 40대의 스트레스가 가장 높았다. 직장에서의 경쟁이나 승진 압박, 자녀 양육, 노부모 부양, 노후 준비 등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너무 많다 보니 스트레스가 높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반면 60대 이상은 전 연령대 중에서 스트레스를 느끼는 비율이 가장 낮았다.
노년 내과 전문의 임영빈씨는 “노인은 몸이 아파서 대개 누워서 지내고, 병원이나 시설에서 지낸다는 사회적인 편견이 많다”면서 “하지만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독립적이면서 활발하게 일상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노년기에 신체적 능력이 감소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살고 있다면, 이는 오래 전부터 운동과 사회 활동을 소홀히 해서 생긴 문제라고 임씨는 덧붙였다.
✅75세 이상 노인 70% “스트레스 없다”
나이가 들면 노쇠해지니까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을 것 같지만, 긍정적인 정보에 눈을 돌리는 고령자들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적게 받는다. 이런 현상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노인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아래 그림은 한국 통계청이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조사해서 발표한 ‘고령자 특성과 의식 변화’ 보고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느끼느냐’고 물었는데 65~74세의 고령자는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전체의 62.4%에 달했다. 나이와 스트레스는 역방향이다. 75세 이상 고령자는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이 66.8%로 더 높았다.
노년이 쓴맛 일색이라는 고정관념은 실제 현실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의 저자 조너선 라우시는 “나이가 들수록 우울증과 역경이 불쑥 찾아올 때 대처하는 능력이 대체로 좋아진다”면서 “경험 축적과 신경학적 발달이 맞물리면서 정신적 회복력이 강해지고, 스트레스와 후회에 덜 민감해진다”고 지적했다.
✅어차피 말년엔 ‘거기서 거기’
‘난 다 가진 것 같은데 왜 불행할까?’
자신의 처지를 늘 비관하는 40~50대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투덜중년’도 인생 말년에는 반전을 맞이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차곡차곡 쌓였던 수많은 집착과 경쟁적 압박을 노화와 함께 내려놓게 된다.
<50부터 뻗어가는 사람 시들어가는 사람>의 저자 마쓰오가즈야(松尾一也)씨는 “최종적인 종착지에 가까운 여든 정도의 나이가 되면 우리는 저마다 비슷한 모습이 된다”면서 “학력이 대단하든, 대기업 임원이든, 비싼 집에 살든, 베스트셀러 저자든 겉으로 봐선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행복한 노년은 ‘자신의 능력과 생각을 노화에 적응시키는 것에 달렸다’는 조언도 있다. 정신과 의사인 와다히데키(和田秀樹)씨는 “아직 이건 할 수 있지, 이것도 남아 있네 하면서 노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며, 가족이나 주위에서도 함께 즐거워 해준다”면서 “나이듦을 받아 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행복한 노년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몸에 나타나는 노쇠 현상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정작 필요한 지팡이, 보청기, 기저귀 같은 노인의 상징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성인용 기저귀에 저항감을 느껴 착용을 거부하면 요실금 걱정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게 되고, 그러면 외출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 고립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남은 인생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어요.”(와다히데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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