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식시장이 중국, 인도, 대만 등 신흥국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는 매력적인 기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온 삼성전자·현대차 같은 대기업의 뒤를 이어주는 제2, 제3의 글로벌 기업을 육성하지 못한 ‘미래 성장 기업의 부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독주가 오래되다 보니 ‘반도체 고점론’ 등이 나올 때마다 국내 주식 시장뿐만 아니라 경제까지 휘청거린다. 여기에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 논란 중인 금융투자소득세 등 증시 저평가 요인도 여전한 상황이다.
◇25년째 시총 1위 삼성전자, 올해 21% 하락
2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시가총액 1위인 반도체 대장주 삼성전자 주가는 올해 들어서만 21%가량 빠졌다. 부실한 실적 전망에 외국인들은 코스피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집중적으로 순매도(매도가 매수보다 많은 것)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 들어 지난 20일까지 외국인은 코스피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5조9210억원어치나 순매도했다. 삼성전자의 3분기(7~9월) 실적도 스마트폰이나 PC 제품 수요 부진 등으로 인해 기대에 못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잇따르자, 국내 증권사 10곳이 이달 들어서만 삼성전자의 목표 주가를 10~26%가량 낮췄다.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신흥국 지수 내 주요 산업군 비율이 20년간 크게 바뀐 점도 외국 큰손들에게 한국의 증시 매력도를 떨어뜨리게 한 요인이다. 2004년 MSCI 신흥국 지수 내 한국 주식 비율은 18.67%였다가 현재 11.67%로 하락했는데, 같은 기간 주요 산업군 중 IT 분야 비율은 16.69%에서 24.24%로 상승했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부진을 보완할 수 있는 국내 대표 IT 기업인 카카오나 네이버의 경우 경영권 이슈, 신사업 부재 등으로 성장이 정체된 상태다.
◇선수 교체하는 대만, 인도
한국과 달리 대만, 인도 등은 대표 기업들이 바뀌는 선순환이 일어나면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대만 경제는 코로나를 기점으로 한때 ‘대만의 삼성’이라고 불리던 애플 최대 위탁생산업체인 폭스콘에서 인공지능(AI) 반도체 위탁생산 주문 기업인 TSMC로 성장 동력이 이동했다. 한때 폭스콘은 대만 GDP(국내총생산)의 22%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1위 기업이었지만, 코로나 이후엔 TSMC에 그 자리를 내줬다. TSMC 주가는 올 들어서만 23%가량 뛰면서 대만 증시 상승세를 이끌었다.
대만의 주도 기업이 폭스콘에서 TSMC로 바뀌면서, 중국 의존도가 낮아진 것도 대만 경제 체질에 도움이 됐다. 대만은 혁신 기업 육성에도 적극적이다. 대만 전문가인 왕수봉 아주대 교수는 “대만은 법인세율(20%)이 한국(24%)보다 낮고 각종 감면으로 실효 세율도 낮은 편”이라며 “TSMC와 같은 첨단 미래 산업에 대한 정부 규제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했다.
인도는 중국보다 많은 인구를 갖고 탄탄한 내수를 바탕으로 유통기업과 금융업 등이 신규 주도 산업으로 활발히 등장하고 있다. 현동식 한국투자신탁운용 해외비즈니스본부장은 “중국의 성장 전략을 모방한 모디 정부의 제조업 육성 정책인 ‘메이크 인 인디아’에 힘입어 중국과 유사한 성장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다”며 “향후에도 건설, 금융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기업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내수 시장이 탄탄한 인도는 석유·통신 대기업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 재벌 그룹인 타타그룹 소속의 IT 기업 ‘타타 컨설턴시 서비스’의 주가도 올해 들어 13%, 12%가량 올랐다. 이들 대장주의 활약과 동시에 인도의 대표 은행인 ICICI 은행이 시가총액 4위에 오르고 시가총액 10대 기업 목록에 은행·금융 기업들이 새로 진입하는 등 증시의 역동성이 높아졌다.
◇기업 지배구조, 금투세 등 증시 저평가 요인 여전
한국에선 차세대 성장 동력산업의 부재뿐 아니라 기업 지배구조 문제 역시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 저평가) 해소를 위해 해결돼야 할 사안으로 꼽힌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는 지난해 한국의 기업 지배 구조 순위를 아시아 12국 중 8위로 평가했다. 일본(2위)은 물론, 홍콩·인도(6위)보다 낮다. ACGA는 아시아의 기업 거버넌스(지배구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1999년 설립된 비영리 단체다.
아마르 길 ACGA 사무총장은 “한국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정부의 로드맵이 부재한 것은 문제점으로, 주주 권리 강화를 위한 입법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내년 금융투자소득세 도입 여부가 결정되지 않아 국내 증시 큰손들이 국내 증시를 떠나는 등 증시 하락 우려 요인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