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다는 이유로 적은 실손보험금을 포기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까다로운 실손보험 청구를 단순화하기 위한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가 한 달 뒤인 다음 달 25일 시행된다. 하지만 신규 제도가 시행돼도 소비자들은 여전히 대부분 병원에서 직접 서류를 떼서 보험금을 청구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 당국이 관련 시스템 구축에 애를 먹고 있을뿐더러, 병원 입장에선 참여하지 않아도 큰 불이익이 없는 탓에 이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양진경

◇실손보험 전산 청구, 한 달 뒤 시행

10년 넘게 보험업계와 의료계가 도입을 두고 줄다리기를 해오던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는 작년 10월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그 결과 다음 달부터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가 병상 30개 이상 병원과 보건소 등 7725개 요양기관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내년 10월부턴 6만9000개에 달하는 동네의 작은 의원이나 2만5000개의 약국으로 확산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보험 소비자는 실손보험을 청구할 때 병원 등에서 일일이 종이 서류를 발급받아 서면이나 이메일, 앱 등으로 보험회사에 내야 했다.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보험금을 타가는 것을 포기해버리는 소비자도 많았다. 정부는 실손보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연간 3000억원에 달한다고 본다. 실손보험 전산 청구가 되면, 소비자가 병원 등에 보험금을 타고 싶다고 요청하면 보험회사로 서류가 전송돼 병원 현장에서 ‘원스톱’으로 보험금이 청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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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작 한 달이 남았는데도 시스템 구축이 지지부진하고 병원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 탓에 소비자들은 여전히 병원 등에서 서류를 떼서 실손보험금을 청구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소비자원 조사에서, 실손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이유로 소비자들이 댄 이유는 ‘보험금이 적어서’ ‘귀찮거나 바빠서’라는 응답이 많았다.

◇병원 참여율 6%, 보험개발원은 5차 모집 공고까지

24일 금융위원회의 ‘요양기관의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 참여 현황’에 따르면, 병상 30개 이상 병원 4235개 중 다음 달 25일에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를 시행하는 곳은 283곳(6.7%)으로 집계됐다. 특히, 시행 대상인 종합병원·병원들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작은 병원 3857곳의 참여 비율은 2.7%에 그친다. 반면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의 참여 비율은 각각 100%, 39.9%로 집계됐다.

병원들 참여가 저조한 것은 의료계 측에서 볼 땐 딱히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에 참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와 의료계가 대립하는 의정 갈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있다.

규모가 작은 병원의 경우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에 참여하고 싶어도 관련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참여하기도 어렵다. 소규모 병원은 자체적으로 시스템을 개발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자의무기록(EMR·Electronic Medical Record) 업체가 관련 시스템을 개발하고 병원에 설치해야 한다. EMR 업체는 환자의 진단, 처방 등의 정보가 담긴 기록을 관리하는 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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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존 EMR 업체 54곳 중 현재 참여 의사를 밝힌 곳은 19개에 불과하다. EMR 업체가 받게 될 1200만원 수준의 개발비와 10만~15만원 수준의 확산비(설치비)와 유지 보수비가 너무 적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EMR 업체는 서비스를 병원별 시스템에 맞춰 일일이 설치해야 하는데, 10만원 수준의 확산비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보험개발원이 지난 7월부터 네 차례에 거쳐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 시스템 구축 확산 사업 참여 기관 모집 공고’를 올렸지만, 업체 신청률이 저조한 탓에 사업자를 선정하지 못했고 최근 5차 공고까지 냈다.

◇금융위, 뒤늦게 의견 조율 나서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금융위원회는 지난 12일 시스템 구축, 연계 현황을 점검한다며 보건복지부, 보험업계, EMR 업체 등과 간담회를 열었다. 하지만, 금융위가 너무 뒤늦게 이해관계자들의 의견 조율에 나섰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EMR 업체 관계자는 “우리 입장에서는 업무 부담만 늘어나고 적정한 대가도 못 받는데 참여할 유인이 없다”며 “적정 비용 등에 대해 사전에 협의가 잘 되지 않았던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더 많은 병원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도 아직 큰 걸림돌로 남아있다. 보건 당국은 이번 간담회를 통해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에 참여한 병원 등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추가적인 병원 참여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실손 보험금 청구 전산화

소비자들이 실손 보험금을 보험사에 청구할 때 병원 등에서 종이 서류를 떼서 보험사에 내는 게 아니라, 병원 등에서 보험사로 전송하는 것이다. 다음 달 25일부터 병상 30개 이상 병원과 보건소 등 7725곳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내년 10월부터는 의원과 약국에서도 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