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의 글로벌 ‘왕따’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의 빅컷(기준금리 0.5%포인트 인하)과 중국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이 불을 지핀 글로벌 증시 랠리에서 한국 주식시장만 소외된 모습이다. 빠질 땐 더 빠지고, 오를 땐 덜 오르는 장세가 이어지자, 투자자들의 탈(脫)한국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 한국 코스피 상승률은 6.5%로 전 세계 주요국 중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확전 우려로 긴장감이 가득한 이스라엘 증시(13.8%)보다도 부진하다. 같은 기간 코스닥지수는 5.6% 떨어지며 최악의 성적을 냈다.
한국 주식시장은 올 상반기 인공지능(AI) 열풍이나 하반기 금리 인하 및 경기 부양 호재에도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등 특정 종목군에 과도하게 쏠린 국내 증시의 민낯이 드러났다고 입을 모은다. 내년 도입 예정인 금융투자소득세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불확실성이 커진 점도 국내 증시를 짓누른다.
✅美 빅컷과 中 경기 부양도 안 먹혀
글로벌 증시는 미국 금리 인하와 중국 경기 부양이라는 겹호재로 한껏 달아오르고 있다. 경기 호전세가 뚜렷한 미국 3대 지수는 연일 축포를 터뜨리고 있고, 중국 본토 증시는 6거래일 동안 25% 올라 지난 1년 반 동안의 부진을 단 1주일 만에 만회했다. 일본·대만·독일·인도의 대표 지수가 올해 초강세장을 지속했고, 지난달엔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서까지 사상 최고치 기록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은 딴판이다. 지난 7월 초 2900선에 육박했던 코스피는 어느새 2500선으로 내려앉았다. 미국 경기 침체론으로 글로벌 증시가 급락했던 지난 8월 5일 쇼크 이후에도 회복세가 더디다. 코스피는 8·5 쇼크 이후 5% 상승해 10~20% 오른 주요국 증시에 비해 크게 뒤진다. 한국 증시가 어느새 외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후진국형’ 증시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안 보이고 마땅한 호재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증시 펀더멘털(기초 체력)인 기업들의 이익이 증가한다면 증시는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다. 하지만 급감하는 기업 실적 전망이 발목을 잡는다. 3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사들이 실적을 전망하는 상장사 249곳의 3분기 영업이익 추정치는 69조1780억원으로 집계됐다. 한 달 전 전망치보다 약 3조원 감소했다.
특히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23%를 차지하는 반도체 투 톱(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경고등이 켜졌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인 모건스탠리가 목표 주가를 ‘7만 전자’로 낮춘 데 이어 맥쿼리는 ‘6만 전자’로 조정했다. 지난 2일 삼성전자는 2023년 3월 16일 이후 처음으로 장중 ‘5만 전자’로 내려앉았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외국인은 한국 증시를 ‘반도체 증시’로 여기는데, 반도체 겨울론이 불거지면서 한국 주식을 팔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과잉 의존에 밸류업 실망감 겹쳐
전문가들은 한국 주식시장에 신규 자금 유입이 거의 없어 점점 사막화되어 간다고 말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하루 평균 거래량은 15억주로, 2019년 이후 5년래 최저치다. 금투세 도입 논쟁이 길어지면서 자산가들은 관망하고, 일반 투자자들은 미국 등 해외로 주식 이민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코로나 당시처럼 외국인과 기관의 매도 물량을 받아주는 개미 군단은 사라졌다. 올해 개인들이 순매도한 코스피 주식만 8조4000억원에 달한다.
분위기 반전을 기대했던 밸류업(기업 가치 개선) 지수도 결국 실망감을 안겼다. ‘고배당·저평가’ 종목들이 아니라 ‘저배당·고평가’ 종목들이 많아 수익 창출과 안정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익을 내지 못하는 부실·적자 기업들이 제때 퇴출되지 않고 남아 시장 건전성을 훼손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전자나 현대차처럼 글로벌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는 차세대 기업들을 키워내지 못한 것도 약점으로 지적된다. 국내 증시에선 삼성전자가 2000년부터 25년째 시가총액 1위를 유지할 만큼 산업 역동성이 떨어졌다. 반면 대만에선 아이폰 생산 업체인 폭스콘에서 반도체 기업 TSMC로 주도 주가 옮겨 갔고, 인도에서도 릴라이언스를 비롯한 IT 업체와 금융사들이 약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