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고재 하회 /락고재

경북 안동시 풍천면 전서로 186-20. 안내 받은 주소로 가다보니 ‘안동하회마을 주차장’이 나옵니다. 제 목적지는 하회마을이 아닌 한옥호텔 ‘락고재 하회’. ‘잘못왔나?’라는 생각에 전화를 걸어보니, 이곳이 맞습니다.

‘락고재 하회’는 안동 하회마을 초입에 1만 6529㎥(5000평) 규모 22동 20객실로 조성됐습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보호구역 안에 존재하는 호텔입니다. 안영환 락고재 회장은 “15년 전에는 문화재보호구역의 기준이 하회마을 안쪽이어서 지금의 부지를 사 호텔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며 “이후 문화재보호구역이 점점 넓어지면서 호텔도 문화재보호구역 안에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숙박도 문화인 시대입니다. 호텔체인 힐튼의 2025년 연례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여행객 4명 중 1명은 내년에 세계와 다양한 문화를 탐험할 계획이며, 현지인이 돼 오랜 시간 여행지에 몰입해 문화를 온전히 경험하는 ‘슬로우 트래블’에 주목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옥 호텔’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는 이유입니다. 올해 전국에 한옥체험업으로 등록된 곳만 2754곳으로 2019년에 비해 56% 증가했습니다.

안영환 락고재 회장 /이혜운 기자

안영환 락고재 회장이 처음 한옥 호텔을 선보인 것은 2003년 서울 북촌입니다. 140년 된 한옥을 인간문화재인 정영진옹이 개조해 고급 한옥호텔을 만들었습니다. 걸그룹 ‘블랙핑크’가 사진을 찍어 외국인 예약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 곳입니다. 그리고 21년 후, 안 회장은 이달 말 안동 하회마을 입구에 새로운 한옥호텔을 엽니다. 완벽한 한옥을 구현하기 위해 걸린 시간은 15년, 설계 변경만 100차례 이상 진행됐다고 합니다. 전통 방식대로 지을 목수가 없어 목수학교까지 만들었습니다. 안 회장의 노하우가 담긴, 이 호텔 만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돈이 되는 여기 힙해 스물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1>”이곳에서 자면 시험합격!” 스토리를 만들어라

한옥 뒤로 보이는 필가봉 /이혜운 기자

락고재 하회의 슈페리어룸. 한옥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붓받침대(필가) 모양으로 줄지어 선 산봉우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붓이나 필가 등을 닮은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공부하면 장원에 급제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방 별명도 ‘학업의 성취를 기원하는 방’. 산의 정기를 받아 합격하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연못 위에 떠 있는 부용정. /이혜운 기자

황톳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부용정’이 나옵니다. 신혼부부들을 위한 객실로, 호텔 부지와 다리 하나로 거리를 두어 속세와 떨어져 그들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객실 앞에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두꺼비상과 거북이상이, 안에는 신하의 손자를 어여삐 여기던 영조 대왕이 직접 하사한 글귀가 걸려 있습니다. 이 방의 별명은 ‘다산의 기운을 비는 방’. 왕의 기운을 받은 아이를 출산하라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찍어낸 듯 똑같은 방은 재미가 없습니다. 이곳에는 이 외에도 ‘궁궐의 일상을 느끼는 방’, ‘사대부의 위엄을 느끼는 방’ 등 8가지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취향에 따라 방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수험생을 둔 부모라면 재미보다는 간절함이 크겠지만요.

<2>고미술 관람하고 창덕궁 옮겨와…”외국인이 더 좋아해”

락고재 하회 내 창덕궁 애련정을 본따 만든 곳. /이혜운 기자

모두 독채 형식으로 된 호텔은 또 하나의 하회마을에 들어선 듯합니다. 한옥 사이를 거닐다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정자가 눈에 띕니다. 창덕궁 후원의 정자인 애련정을 그대로 본따 만든 것입니다. 애련정은 왕과 왕비가 수행비서 없이 단둘이 이용했던 정자입니다. 아기자기한 색감과 마감이 돋보입니다. 이 밖에도 창덕궁의 관람정, 연경당, 낙선재 등 궁궐 안의 건축물을 고스란히 옮겼습니다. 조선시대 왕이 된 듯한 경험을 위한 것입니다. 호텔 ‘VIP동’ 대문은 전주 이씨의 열녀문, 마당에는 순조의 자녀가 생활하던 공간에 있던 수석 3점이 놓여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되어보는 경험입니다.

최근 해외여행 트렌드는 ‘관광지 중심’에서 벗어나 ‘현지 문화 체험’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 지를 가슴 가득 느끼고 싶어합니다.

박물관 같은 락고재 로비. /이혜운 기자

락고재 로비에는 거대한 규모의 목판활자 기구가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목판활자 기구입니다. 단아한 매력의 달항아리 뒤로는 거대한 서예화가 펼쳐집니다. 객실 내부에서도 다양한 고미술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13세기·14세기 고미술품이 방 안 이곳저곳에 놓여있고, 17세기 자기는 디퓨저 용기로 사용 중입니다. 화장실 비누받침대는 19세기 제기(祭器)를 활용했습니다. 안 회장은 “박물관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고미술품을 접하는 게 아니라 생활하면서 만져보고 즐길 수 있게 연출하고자 했다”며 “고미술 설명회도 주기적으로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락고재 하회 사당. /이혜운 기자

락고재 하회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당도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삿밥을 먹는 서비스가 운영될 예정입니다. 제사에 쓰는 제기도 모두 14세기 제품들입니다. 일부 객실에는 방 안에 아궁이도 있습니다. 겨울이면 투숙객들은 겨울철 장작불을 펴 온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찜질방과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황톳길, 족욕탕 등이 있습니다.

<3>완벽을 위한 고집…”목수 학교까지 만들었다”

락고재 하회 지붕. /이혜운 기자

그러나 안 회장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한옥 그 자체입니다. 그는 한옥이 단지 건축물이 아니라 후대에 물려줄 문화유산이라는 철학에 전통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한옥 주인이 한옥에 크게 신경을 썼는지 파악하려면 천장, 지붕, 주춧돌 세 가지를 보면 된다고 합니다.

첫 번째, 천장은 다른 한옥에서 보기 어려운 ‘우물(井)천장’입니다. 궁궐 양식에서 주로 채택하는 마감 방식입니다. 두 번째는 팔작(八作) 지붕. 한옥의 지붕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우리 건축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지붕 형태입니다. 세 번째는 기둥을 받쳐 놓은 주춧돌. 문경에서 밭돌을 정으로 쪼아 떼어 모양을 만들어 냈습니다.

락고재에서는 완벽한 ‘차경(借景)’을 완성하기 위해 정교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차경이란, 창문을 액자로, 바깥의 풍경을 액자 속의 그림으로 여긴 한옥만의 철학입니다. 나무를 심는 각 도부터 독채끼리의 거리까지 계산했다고 합니다. 재료도 까다롭게 골랐습니다. 목재는 울진 소나무, 기와는 자연스러움을 위해 일부러 ‘색이 바랜 기와’를 공수했습니다.

락고재 하회 지붕. /이혜운 기자

이렇게 할 목수 인력이 부족해 안 회장은 직접 안동에 목수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출한 목수만 80여명. 이 호텔은 학교에서 배출한 목수들의 실습터이기도 했습니다.

전통을 그대로 옮기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락고재를 거닐다 보면 커다란 흑색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했던 ‘모노리스’를 본뜬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이 비석은 생명의 진화를 다루고, 미래와의 연결을 나타내는 초월적인 도구로 등장합니다. 한옥의 진화를 꿈꾸고, 한옥이라는 우리 고유의 전통을 미래 세대에게 전하겠다는 안 회장의 포부가 담겨있는 공간입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모노리스 본뜬 비석. /이혜운 기자

이런 공간은 또 있습니다. 밤이 되면 락고재는 또 다른 매력을 드러냅니다. 기와지붕 측면에 위치한 ‘합각’에 영문 모를 동그란 점들이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있습니다. 동그란 점을 따라 선을 그어보니 사자자리가 나타납니다. 조황도 12궁. 전통적인 기술과 정신을 모두 계승하고자 하는 안 회장의 뜻이 담겼습니다.

락고재 하회는 올 4월부터 가오픈해 투숙객을 맞고 있습니다. 가오픈 기간 투숙객의 절반가량이 외국인인 데다가 국적별로는 프랑스 관광객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안 회장은 “한국 문화의 본질은 풍류에 있는데 풍류의 본질은 자연이고 자연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한옥”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풍류를 느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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