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자가 귀한 시절 아껴 썼던 습관은 평생 가나 봐요. 자식들보다 현금이 많으신데, 부모님이 엄청 절약하세요. 택시비 아깝다고 지하철 타시고, 호텔 식당 예약하면 비싸다며 바꾸라고 하세요.”

“집은 절대 팔 수 없다고, 팔아버리면 없어진다고 아끼고 사세요. (나중에 상속세로) 나라만 좋은 일 시키는 거니까 다 쓰시고 가시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어요.”

고령화로 압축되는 국내 인구 구조 변화가 국가 경제의 판을 흔들고 있다. 노년 세대에 집중되어 있는 부(富)가 고인물처럼 흐르지 않고 장기 체류하기 때문이다.

‘아플까봐’ 혹은 ‘오래 살까봐’ 걱정인 고령층은 소비보다 저축을 선호하고, 돈도 예·적금 같은 안전한 금융상품에만 묶어두려고 한다. 물가 상승으로 노후 생활비가 부쩍 늘어난 데다 부동산 보유세와 건강보험료 부담 때문에 필수 지출 외에는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다.

한국개발연구원(KDI)·국회예산정책처 등 연구 기관들은 장기화되는 내수 부진의 원인 중 하나로 인구 고령화를 꼽는다. 한국은행 추정에 따르면, 고령 인구 증가 여파로 가계 평균 소비는 앞으로 10년간 연평균 0.7%씩 감소한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김영재

✅노년층 순자산 3890兆... 청년층 3배

대한민국 부(富)의 지도에서 노년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전쟁 이후 태어나 한국의 고도 성장기에 자산을 축적했던 1차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28일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를 토대로 추정해 보면, 60세 이상 가구주의 순자산(자산에서 부채를 뺀 것) 규모는 2023년 기준 3890조원으로, 2015년 대비 133% 늘었다. 전체 순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0%에 육박한다. 반면 39세 이하 청년 가구주의 순자산 규모는 같은 기간 918조원에서 1160조원으로 26% 늘어나는 데 그쳤다.

우리보다 앞서 노인대국이 된 일본을 보면, 이런 추세는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지난 2월 일본은행(BOJ) 발표에 따르면, 작년 말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 2200조엔 중 60%를 60세 이상 노년층이 보유하고 있다. 일본 닛케이신문은 최근 “고령층이 보유한 자산은 순환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 경제 성장에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한유진

✅100세가 넘어도 하는 ‘돈 걱정’

지난 1990년대 일본에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최고령 쌍둥이 자매인 킨(金)·긴(銀) 할머니 얘기다. 1892년생인 이들은 100세를 넘긴 이후에도 밝고 유쾌하게 생활해 ‘건강한 노년’의 아이콘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106세, 107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방송 출연, 강연 초빙은 물론이고, 광고 모델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할머니들이 103세가 되던 해, 한 TV 토크쇼에서 진행자가 이렇게 물었다. “방송에 나와서 번 출연료는 어떻게 하십니까?”

‘금방울 은방울’ 자매의 대답은 이랬다. “노후에 대비해 저축합니다.”

일본 나고야시에 사는 100살 넘은 쌍둥이 자매 할머니는 장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것", "생선을 먹는 것"이라고 각자 대답했다. /조선일보 DB

킨(金)·긴(銀) 할머니들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 100세가 넘는 고령층에게도 경제적 안정은 노후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일본은 가계 금융자산이 계속 불어나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고령 세대의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2023년 일본 총무성 가계조사에 따르면, 70세 이상 2인 가구의 가계 지출은 월 25만엔(약 228만원) 수준이었다. 전 연령대 평균인 29만4000엔보다 4만엔 가량 적다.

웬만하면 돈을 쓰지 않으니, 고령 세대의 통장 잔액은 계속 불어난다. 2023년 기준 70세 이상 가구의 저축 잔고는 전년 대비 3.8% 증가한 2503만엔에 달했다. 전체 연령대 평균인 1904만엔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불확실한 노후에 대비하려는 심리 때문에 소비보다 저축에 집중한 결과다.

반면 젊은층은 내집마련으로 빚을 지면서 현금 흐름이 적자 상태다. 40세 미만 가구의 평균 저축액은 782만엔으로 낮은 반면, 평균 부채는 저축의 2.2배인 1757만엔에 육박했다.

코로나 이후 60세 이상 고령층의 소비 둔화가 두드러진다./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코로나 이후 고령층 소비성향 더 낮아져

한국은 어떨까. 28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분기 기준 우리나라 60세 이상 가구주의 평균소비성향은 65.7%였다. 소비성향이란, 처분가능소득에서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평균소비성향 65.7%라는 것은, 100만원을 벌면 65만7000원을 쓴다는 얘기다.

지난 2012년만 해도 60세 이상 가구주의 소비성향은 75%에 달했고 코로나 이전인 2019년 3분기만 해도 70% 수준은 유지했다. 하지만 물가 상승 속에 허리띠를 졸라 매는 노인들이 늘면서 소비성향은 지속적으로 하락 중이다.

은퇴자들은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있어도 언제 갑자기 아플지도 모르고, 혹시 오래 살지도 몰라 불안해서 지갑을 열 수 없다고 말한다. 은퇴 생활자 이모씨는 “늘그막에 집 한 채 밖에 없는데, 병원비와 재산세, 건강보험료까지 다 내야 하니 빠듯하다”면서 “백세 시대라고 말을 들으면 겁이 나서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고 말했다.

서울에 사는 70대 김모씨도 “나이 들면 활동이 줄어드니 좋은 옷도 필요 없고 외식도 귀찮고 지갑 열 데는 자식 뿐인데 증여세가 부담된다”면서 “살아서 내나 죽어서 내나 어차피 낼 세금이지만, 살아있는 지금은 (세금이) 무섭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수명 증가와 장수에 대비해 재산을 쌓아두려는 노년층 성향 때문에 일본에선 '노노(老老)상속'이 사회적 문제다./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韓 “병들어 오래 살까봐 지갑 닫는다”

일본과 한국의 노인들은 현재의 소비를 꺼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노년층에 쏠린 자산이 소비·투자로 연결되지 않으면 경제가 활력을 잃고 성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은퇴 쓰나미’를 앞두고 있는 한국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7월 우리나라 단일 세대 중 가장 큰 규모인 2차 베이비부머(954만명, 1968~74년생)가 은퇴 연령에 진입할 예정이어서 전체 소비성향이 더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 5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경제 고속 성장과 함께 부동산과 연금 등으로 부를 축적한 베이비붐 세대가 소비를 줄이고 있다”면서 “이들의 선택이 2020~2030년대 경제성장·인플레이션·금리 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美 “노년층 소비가 국가 경제 원동력”

그렇다면 고령 세대의 소비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미국의 연령대별 소비성향을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지난 8월 펴낸 ‘내수 파헤쳐 보기’ 보고서에서 “미국의 연령대별 소비성향을 분석해 보면 청년기와 노년기에 높고 중장년기에는 낮은 U자형 곡선을 그린다”면서 “미국에선 연금 소득이 넉넉한 미국의 고령층은 전 연령대 중 소비성향이 가장 높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경제 활동을 하며 노후 대비를 충분히 해둔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은퇴 후에도 여유 있게 지출하며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퇴직연금과 부동산 등의 자산 가치가 수십 년간 상승하면서 상당한 경제적 여유를 얻게 됐다. 지난 9월 기준 베이비붐 세대의 총자산은 78조 달러(10경8500조원)에 달해 다른 세대보다 월등히 많았다. 베이비붐 세대가 자녀 양육비로 쓰던 돈을 골프, 콘서트, 클래식 자동차, 스카이다이빙 등에 쓰면서 미국 경제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WSJ는 분석했다.

경제 대국인 미국은 부(富)의 이전으로 나타나는 경제 효과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미국은 상속세와 증여세 면제액을 계속 높여왔는데, 작년 기준 1290만달러(약 180억원)에 달했다. 부부 합산이면 2580만달러까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워런버핏 같은 수퍼리치가 아니라면 세금이 거의 없다.

🥗은퇴 이후에 소득은 주는데 수명은 길어지니까 불안한 마음에 허리띠를 졸라매게 되는 것 같아요. 노후 준비는 조선일보 [왕개미연구소]와 함께 하세요. 구독 주소는 www.chosun.com/tag/a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