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뉴욕 증시에서는 연일 사상 최고치가 바뀌는 ‘트럼프 랠리(강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 증시는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2일 코스피는 기관 투자자와 외국인의 매도세가 이어지며 전날보다 1.94% 하락한 2482.57로 장을 마감했다. 지난 8월 5일 블랙먼데이 이후 3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진 것이다.
코스피는 미 대선 이후 7일 하루(0.04% 상승)를 빼고는 죄다 하락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5거래일간 하락률이 3.66%(5~12일)로 주요국 증시 가운데 가장 부진했다. 트럼프 랠리에서 한국만 소외된 모습이다. 주식뿐 아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 종가보다 8.8원 오른 1403.5원(오후 3시 30분 기준)에 마감했다. 마감가 기준으로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22년 미국발 고금리 충격 이후 네 번째 보는 1400원대 환율이다. 대내외적인 경제 충격이 없는데도 환율이 1400원 선을 넘은 것은 이례적 현상이다.
반면 나라 밖은 ‘트럼프 랠리‘로 화색이 돈다. 달러, 비트코인, 테슬라 주식이 트럼프 랠리의 혜택을 보는 3대 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 정책의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되는 비트코인은 12일 8만9000달러를 돌파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성향으로 대립각을 세울 것으로 우려됐던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도 미 대선 전과 비교하면 1.03% 올랐고, 일본도 2.34% 상승했다.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도 같은 기간 각각 1.57%, 0.75% 올랐다. 전쟁 중인 이스라엘 TA-35 증시는 3.09% 상승했다. 주요국 가운데 한국처럼 미·중 의존도가 높은 대만만 0.54% 떨어졌지만, 하락폭은 한국보다 훨씬 작았다.
트럼프 랠리에서 한국만 소외된 가장 큰 이유는 트럼프 2기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한국 경제에 직격탄을 날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트럼프가 공약대로 관세를 올리면 한국의 대미 수출이 어려워지고, 여기에 더해 미·중 갈등이 심화될 경우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큰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트럼프 공약대로 관세가 오르면 세계 교역량이 0.36~3.60% 감소하면서 한국의 수출이 적게는 142억6000만달러, 많게는 347억4000만달러 줄어들 것으로 추정한다”며 “이에 따라 한국 경제성장률은 최대 1.1%포인트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트럼프 당선인이 강경한 무역 정책을 취하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경제권에도 문제가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른바 ‘두더지 잡기(Whack-a-Mole)’ 방식으로 미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도 관세 폭탄으로 적자를 경감하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럴 경우 현재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내고 있는 한국과 대만, 베트남 등이 타깃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한국 증시 약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윤석모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글로벌 금융 환경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IT(정보기술) 업종을 중심으로 이익 전망치 하향 조정이 지속되면서 이를 근거로 한 외국인 매도가 지속될 것”이라며 “코스피가 반등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이익 전망치 하향 조정 추세가 일단락되고, 미국 정책 등 대외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해소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한국 증시가 경제 펀더멘털(기초 체력)에 비해 과도하게 하락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8~2019년 미·중 무역 분쟁으로 한국 증시가 하락했을 때 코스피 상장기업들의 주가순자산비율(PBR·주가를 주당 순자산으로 나눈 값)이 0.8배까지 떨어졌는데, 현재 이 비율이 0.86배로 떨어져 저평가 수준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의 PBR도 역대 최저 수준인 0.96배로 추락해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 증시와 삼성전자 하락세는 경쟁력 대비 과도한 측면이 있는 만큼 일시적 패닉(공황)에서 벗어나면 반등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