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는 언어나 운동 능력이 또래보다 늦는 발달 지연 아동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실손 보험으로 청구해 받으라”고 안내하고 있다. 원래 발달 지연 치료는 소아과와 재활의학과, 정신과 등이 주로 맡는 분야다. 이상하게 여긴 보험사가 현장 확인한 결과, 이 클리닉 운영에는 ‘브로커(중개인)’가 개입돼 있었다. 의료 컨설팅을 하는 A 업체가 성형외과 원장에게 발달 클리닉 개설을 제안한 것이다.
A 업체와 성형외과는 “발달 클리닉 운영 매출액의 15%를 수수료 명목으로 A 업체에 지급하고 발달 클리닉 운영 전반을 A 업체에 일임한다”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사실상 클리닉을 운영하는 A 업체는 학부모에게 과잉 진료를 권유하거나, 이미 호전된 아동이 불필요한 치료를 받도록 유도한다는 혐의를 받는다. 또 고객 유치를 위해 환자를 소개한 이들에게 고액의 상품권을 제공하는 등 불법 환자 유인·알선 행위를 한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보험사 관계자는 “발달 지연 관련 실손 보험금은 최근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브로커들이 이 영역이 돈이 된다고 생각해 점점 붙으며 생기는 문제”라고 했다.
실손 의료보험 누수 문제가 해마다 심각해지는 가운데 브로커들이 비급여를 보장해 주는 실손 보험의 허점을 파고들어 불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브로커란 의료 기관과 환자 사이에서 환자를 소개하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중개인 등을 말한다. 위 사례처럼 브로커들은 컨설팅이나 마케팅이라는 명분으로 의료 기관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한다.
◇비급여 노리는 브로커들
브로커들이 노리는 건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다. 비급여는 필수 의료 위주의 급여 항목과는 달리 보건 당국의 관리를 거의 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이 때문에 도수 치료나 비타민·영양 주사 비급여를 이용한 실손 보험 타먹기가 성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병원은 환자에게 비급여 치료를 권해 수익을 내고, 환자도 실손 보험으로 환급받으면 별 손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브로커까지 개입해서 실손 보험과 의료 체계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예컨대, 브로커가 병원에서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환자를 모집해 오는 경우나 브로커가 의사 명의를 빌려 의료 시설을 운영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피부 미용처럼 실손 보험에서 보상하지 않는 시술을 받은 후, 치료받은 것처럼 조작해 보험금을 청구하는 경우도 브로커가 개입하는 사례가 많다. 브로커들의 이런 행위는 보험 사기 방지 특별법, 의료법 등을 위반하는 명백한 불법 행위로 처벌 대상이다.
◇백내장 막히자… 발달 지연 치료, 한방 병원 등으로 가는 브로커들
최근 실손 보험 적자 원인이었던 백내장 수술 뒤에도 브로커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험업계는 보고 있다. 백내장 수술은 2022년 ‘입원이 불필요하다’는 대법원 판결로 과잉 진료가 어려워졌다.
보험업계에서는 “백내장 수술은 브로커들이 붙으면서 문제가 커졌는데, 이제 브로커들이 백내장 수술 분야를 넘어 다른 분야를 찾아 활개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서는 비급여 지급 보험금이 가파른 분야에서 브로커의 개입이 활발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발달 지연 과잉 의료 문제다. 발달 지연 관련 실손 보험금은 2022년과 2023년 각각 전년 대비 41.8%, 28.9% 늘었다.
한방 병원이나 요양 병원 등도 브로커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한방 병원의 경우, 일부 보험 사기 브로커 조직이 실손 보험 보장이 안 되는 공진단 등을 처방받은 후 실손 보험에서 보상되는 항목으로 허위 청구하는 방식의 보험 사기 행위를 벌이고 있다.
◇올해 상반기 실손 보험금 중 59%가 비급여
브로커들이 의료 기관과 결탁해 불필요한 비급여 진료를 부추기면서 실손 보험 누수는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18일 본지가 5대 손해보험사(삼성화재·현대해상·KB손해보험·DB손해보험·메리츠화재)에서 취합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실손 보험 지급 보험금은 4조8102억원으로 이 중 2조8392억원(59%)이 비급여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