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한국 주식시장을 업그레이드하겠다며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정책을 펴던 정부가 정작 트럼프 트레이드(트럼프 정책에 이익을 볼 수 있는 자산에 투자하는 것)‘로 한국 증시가 역주행하는데 2000억원의 밸류업 펀드 투자를 개시하겠다는 정책을 내놨다. 게다가 지난 9월 말 내놨던 코리아 밸류업 지수는 선정 기준이 엇박자를 보인다는 비난에 지수 발표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다시 조정하겠다고 나섰다.
◇밸류업 펀드 2000억원 개시가 증시 대책?
18일 오전 8시 정부서울청사에서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감원장, 정은보 거래소 이사장,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 김정각 증권금융 사장, 이용재 국제금융센터 원장 등 6명은 ‘증시 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최근 국내·해외 주요국 증시 동향 등을 점검하고 향후 대응 방향을 논의했다. 최근 국내 주식시장의 하락세가 급격한데 당국의 대응이 없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예정에 없던 대책 회의를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온 대책은 한국거래소 등이 이번 주부터 2000억원 규모의 밸류업 펀드 자금 집행을 개시하고, 3000억원 규모의 추가 펀드 조성도 추진할 계획이라는 걸 밝힌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날 삼성전자가 1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규모를 밝힌 영향으로 코스피가 2% 넘게 상승하자, 정부가 이미 조성하기로 한 밸류업 펀드 2000억원을 투입한다는 얘기를 반복하는 것에 그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한국거래소가 이날부터 투입하기로 한 밸류업 펀드 2000억원은 한국증권금융 등 증권 유관 기관들이 1000억원을 출자하고 이를 민간 자금과 매칭해 만드는 것이다. 밸류업 지수 상장지수펀드(ETF) 구성 종목이 주요 투자 대상이지만, 밸류업 공시를 했지만 지수에 미편입된 종목들도 투자 대상에 포함된다.
◇한국거래소 “밸류업 지수 리밸런싱”
한국거래소는 또 이날 보도 자료를 내고 “지수 발표 이후 밸류업 공시를 이행했거나 연내 공시를 계획 중인 기업이 계속 증가하고 있어 이들 기업에 대한 조기 지수 편입이 필요하다”며 특별 리밸런싱(편입 재조정)을 하겠다고 했다. 야심 차게 준비했다는 밸류업 지수를 만든 지 2개월도 안 돼서 다시 종목을 재조정하겠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앞서 한국거래소는 지난 9월 24일 2년 연속 배당 여부, ROE(자기자본이익률), PBR(주가순자산비율) 등을 기준으로 100종목을 선정해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발표했다. 그러나 시가총액 규모나 주주 환원 성적이 높았던 KB금융이나 하나금융 등 주요 금융사가 빠지고, 수익성(2년 합산 흑자)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SK하이닉스는 포함되면서 종목 선정 형평성에 논란이 제기됐다.
더구나 이번 리밸런싱에서는 밸류업 지수 발표일(9월 24일) 이후부터 다음 달 6일까지 밸류업 공시를 이행한 기업들 중에서 새로 포함할 기업을 고르겠고 기업들을 빼지는 않겠다고 했다. 이에 당초 100종목을 선정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100개 넘는 기업이 밸류업 지수에 포함되면서 고무줄 기준 논란도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거래소에 따르면, 지수 발표 이후 15일까지 밸류업 계획 본공시를 한 기업은 32곳이다. 지수 구성 종목 변경일은 다음 달 20일이다.
◇밸류업 정책 효과는 미미…밸류업 지수 -2.9%
밸류업 지수는 9월 30일 992.13으로 출발했지만 18일 963.30으로 마감해 2.9% 하락했다. 밸류업 지수 발표 초반에는 반짝 관심을 받으며 1023.83까지 올랐지만, 5일 미 대선 이후 트럼프 트레이드로 한국 증시가 소외되면서 밸류업 지수도 크게 하락한 것이다.
밸류업이 아니라 기업 가치를 저해하는 이른바 ‘밸류킬(Kill)’ 사례들도 등장했다. 회사 주가에 호재인 정보는 장중에, 악재 정보는 장 마감 이후 공시해 ‘얌체 공시’ 논란이 일었던 이수페타시스는 최근 한 달간 주가가 51% 하락했다.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고려아연 역시 유상증자를 결정한 지난달 30일 하한가를 기록한 이후 주가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시장 관계자는 “밸류업 정책은 일관성을 갖고 추진해도 단기에 성과가 나기 어려운데, 증시 대책이라고 밸류업 펀드 2000억원을 넣는다든지,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밸류업 지수를 바꾸는 등의 행태는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에 역부족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