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시의 소설 ‘해녀들의 섬’을 읽고 제주 해녀들에게 반해버렸어요. 이번 노벨문학상도 한국의 작가 한강이 받았다던데, 어떤 작품을 읽으면 좋을까요?”
최근 방한한 베쓰 노박 밀리켄 스파츠우드 대표가 물었습니다. 스파츠우드는 미 나파밸리 10대 와이너리 중 하나입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보르도의 여왕 샤또 마고에 비유해 ‘나파의 마고’라고도 부릅니다. 1972년 아버지가 나파에 구입한 포도원을 물려 받아 운영하고 있는 그는 1998년 나파밸리 와이너리 단체인 ‘나파밸리 빈트너스’ 대표를 최연소이자 최초의 여성으로 역임했습니다.
이런 그녀는 어떻게 제주의 해녀에 빠지게 된 것일까요? 돈이 되는 여기 힙해 서른 번째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전원 생활을 꿈꾼 의사 아버지
베스의 아버지 잭은 의사였습니다. 어머니 메리는 사업가 아버지를 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지요. 그녀의 부모님들은 스탠포드대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미 샌디에이고에 병원을 열며 가정을 꾸렸습니다. 베스를 포함해 다섯 명의 자녀를 둔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 잭은 친구의 초청으로 나파 밸리를 방문했다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런 자연 친화적인 환경에서 자식들을 키우고 싶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972년 잭은 샌디에이고 해변가에 있던 병원을 팔아 나파에 있던 포도원 스파츠우드를 구입했습니다. 금주법 이전인 1882년에 조성된 아름답고 오래된 농장이었습니다. 그들이 살 집은 1885년에 지어진 빅토리아풍 저택이었습니다. 당시 나파 와이너리의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 샌디에이고 의사 집안 딸에서 갑자기 나파의 포도원으로 이사하게 된 소녀 베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정말 황당했죠. 집 주변엔 포도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제대로 된 식당이나 옷 가게도 없었다니깐요?”
나파로 이사하기 전까지 그녀의 부모님은 농사 한 번 지은 적 없지만 곧 적응했습니다. 그들은 오래된 포도원을 가꾸고, 포도나무를 새로 심었습니다. 오래된 집도 수리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트랙터 모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와 연구를 하며 포도를 키웠습니다. 베스를 포함한 다섯 남매도 시골 생활에 적응해갔습니다.
그러나 베스 가족의 포도원 생활은 상상처럼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경험이 없는 이들의 포도를 비싼 값에 사줄 와이너리는 없었습니다. 병원을 팔아 마련한 자금도 무섭게 떨어졌습니다. 4~5년간 포도나무를 가꾸며 돈을 다 써버린 아버지 잭은 결국 도시 의사 생활로 복귀했습니다.
◇홀로 남은 어머니 메리의 도전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가족에게 불행이 찾아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입니다. 그녀의 어머니 메리는 다섯 아이와 드넓은 포도밭을 끌어안은 채 혼자가 됩니다.
어머니 메리는 남편이 사랑했던 이 포도밭을 팔아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나파에 남아 삶을 이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일단 최고의 포도를 키우는데 열정과 사랑을 바칩니다. 농사도 지역 최초로 유기농법으로 전환합니다. 이후 그들의 포도는 좋다고 소문이 났고, 이웃 명문 와이너리인 몬다비, 쉐이퍼, 덕혼에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포도를 매입하는 와인 생산자들이 말합니다. “이렇게 좋은 포도로 왜 직접 와인을 만들지 않는 거야?”
이웃의 격려에 메리는 1982년 직접 자신들의 와인을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5년 뒤 그녀의 장녀인 베스 노박은 26세 나이로 와이너리를 물려 받습니다.
◇부모님의 유산, 훌륭한 와이너리로 발전시킨 딸 베스
아버지가 전재산을 팔아 구입하고, 어머니가 청춘을 넣어 열정과 끈기로 일군 이 포도밭을, 베스는 명문 와이너리로 성장시킵니다. 나파에 아버지와 아들이 포도밭을 운영하는 경우는 많지만, 어머니와 딸이 운영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기본적으로 농사일이라 힘들고 고되기 때문입니다. 스파츠우드는 보기 드문 나파의 여성 생산자입니다. 오래된 포도원을 세계적인 와이너리로 성장시킨 이 모녀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위기에 강합니다. 2008년 나파가 산불에 휩싸였을 때,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앞장선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들 와인은 나파의 그 어느 와인보다도 우아합니다. 로버트 파커가 “나파의 샤또 마고”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비평가 존 보네는 스파츠우드를 “포도에 대한 가장 진지한 노력”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박 가족의 역사가 생계를 어깨에 짊어진 채 바다로 뛰어드는 제주 해녀들이 와닿은 것입니다. 남편을 잃은 제주 해녀들이 드넓은 바다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가장을 잃은 노박 가족들은 드넓은 포도원에서 살아 남아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이지요.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K문학 열풍 이어지길
그러나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건 이 부분이었습니다. 리사 시는 ‘21세기 펄 벅’으로 불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지만, 중국인인 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아 중국과 한국 여성에 대한 소설을 써왔습니다.
베스는 중국계인 그녀의 소설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을 읽어보려고 했으나 정보가 적었던 것이지요.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작품상 등 4개 부문 수상의 쾌거를 올린 현장입니다. 당시 할리우드에 2주간 있으며 놀라웠던 건 봉준호의 기생충으로 시작된 한국 영화 열기입니다. 이들은 봉 감독의 다른 작품 뿐만 아니라 박찬욱 감독, 이창동 감독 등에도 관심을 가졌고, 여기 저기서 한국 영화를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뷰잉 파티’들이 열렸습니다.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알리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 이후 해외 일부 서점에서 매진된 것 외에는 후속 열기가 없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책이라는 다소 접근이 어려운 장르이기도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여기저기서 ‘낭독회’가 열리고, 한강에 힘입어 정세랑, 김초엽 같은 젊은 작가들도 함께 인기를 끌며 ‘K문학’의 붐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램인 것이지요.
<Tip>
참고로 베스와 만난 곳은 서울 압구정에 있는 평양냉면집 ‘압구정 면옥’이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담고 있는 평양냉면의 이야기에 그녀는 매우 흥미로워했습니다.
평소 채식을 선호한다는 그는 “메밀의 향이 선명하게 올라와서 좋다”며 “차가운 육수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국물만이 아니라 면의 식감과 향을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김치도 “피클과 달리 제조 과정 중 식초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 놀랍다”며 “채소와 야채의 당분이 발효의 과정을 통해 산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정말 신기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녀가 가장 흥미로워했던 건 육회였습니다. 그녀는 “육회와 함께 나온 ‘감태’는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형태의 해조류로 더 단 맛이 나는게 특이하다”며 “특히 가볍게 간을 한 육회와 배, 감태의 조합을 최고의 조합”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녀가 한강의 소설을 읽고 미국으로 돌아가 한강과 한식을 더욱 소문내줬으면 하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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