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성규

말기암 판정을 받은 40대 A씨는 최근 한 생명보험사와 보험금 신탁(信託) 계약을 맺었다. 초등학생인 자녀가 A씨의 사망보험금 6억원을 미래를 위해 잘 썼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보험사는 A씨 자녀에게 앞으로 9년간 매달 300만원씩 교육비, 생활비 등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또,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는 해에 1억원,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남은 2억원 정도를 지급하도록 설계했다.

이달 초만 해도 A씨는 이런 계약을 맺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선 그간 사망보험금에 대해서는 신탁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탁이란 쉽게 말해 돈을 믿고 맡기는 것으로, 자신의 재산을 전문가에게 맡겨 관리·운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정부가 보험금 청구권을 신탁할 수 있게 규제를 풀면서 보험사,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고객을 대신해 사망보험금까지 관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받을 보험금, 신탁할 수 있어

24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 등이 시행되면서 보험금 청구권 신탁이 지난 12일부터 가능해졌다. 보험금 청구권 신탁은 보험사에서 앞으로 받을 사망보험금을 보험사, 은행 등 신탁회사가 운용·관리해 수익자에게 돌려주는 상품이다.

피보험자가 사망하기 전에 신탁 계약을 맺으면, 수익자가 받게 될 보험금의 지급 방식, 금액, 시기 등을 수익자의 상황에 따라 맞춤형으로 설계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보험 계약자가 사망하면 유족이나 수익자에게 보험금이 한꺼번에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지정한 시기에 사망보험금을 나눠 받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래픽=김성규

◇883조원 시장 열렸다

업계에서는 보험금 청구권 신탁이 가능해지면서 사망보험금을 둘러싼 가족 간 분쟁 등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보험 가입자 중에는 본인이 죽고 난 뒤, 사망보험금이 제대로 수익자에게 돌아갈지, 사망보험금을 수익자가 허투루 쓰진 않을지 등에 대해 걱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보험금 청구권 신탁이 도입되면서, 한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됐다.

보험금 청구권 신탁을 반기는 건 보험 가입자뿐만 아니다. 수수료 수익 등을 얻을 수 있는 금융회사들도 시장이 열리자 적극적으로 고객 유치전에 나서고 있다. 24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22개 생명보험사의 사망보험금 누적 잔액은 무려 883조원에 달한다.

보험금 청구권 신탁은 현재 종합재산신탁업 자격을 취득한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흥국생명, 미래에셋생명 등 5개 생명보험사와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에서 할 수 있다.

보험금 청구권 신탁은 모든 사망보험금이 대상이 아니라 요건이 있다. 일반 사망 보험금 3000만원 이상인 종신보험 및 정기보험이 대상이다. 재해·질병 사망에 대한 보험금은 신탁 대상이 아니다. 보험 계약자와 피보험자, 위탁자가 모두 동일인이어야 하고 수익자는 직계 존비속과 배우자로 제한된다. 신탁 계약 시 보험계약대출(약관대출)은 없어야 한다.

◇생보사, 3억 미만 가입이 대다수

일각에서는 “신탁은 부자들만 가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지만, 실제 계약건들을 보면 다양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24일 삼성생명에 따르면, 보험금 청구권 신탁이 출시된 지난 12일부터 5일간 신탁 가입 고객은 156명, 가입 금액은 총 755억원으로 집계됐다. 가장 많이 가입한 금액 구간은 3억원 미만(96건)으로, 이들의 평균 가입 금액은 1억2000만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보험금청구권신탁은 부유층만이 선호하는 상품이 아니라, 보험금이 의미 있게 사용되길 원하는 대중적 요구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특히 3억원 미만 사망보험금의 신탁 가입 사례를 보면, 대학 졸업이나 결혼 등 특정 시점에 고인을 기억할 수 있는 용도로 지급하는 계약 사례가 많다고 한다.

교보생명도 지난 21일 기준 총 81건의 신탁 계약이 체결됐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금액대별 계약 현황을 보면, 1억원 미만 보험금과 3억~4억원 보험금 구간의 비중이 가장 크다”며 “다른 생명보험사 보험금에 대한 신탁 계약 건도 있다”고 했다. 한화생명은 상품 출시를 검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