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기업인 일본오라클은 시가총액이 2조엔(약 18조원)에 육박하는 초대형 기업이다. 우리나라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SK이노베이션(시총 기준 23위)과 덩치가 비슷하다.

그런데 일본오라클은 놀랍게도 도쿄 증시의 최상위 부문인 ‘프라임’이 아니라, 프라임 아래 하위 시장인 ‘스탠다드’ 소속이다.

프라임은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의 최상위 시장으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초우량 기업들이 상장된 곳이다. 프로 축구에 빗대면 1부 리그다. 프라임 시장에서 거래되면, 해외 인지도가 높아지고 자금 조달도 용이해진다.

그런데 일본오라클 같은 큰 기업이 1부 리그에서 제외된 이유는 왜일까. 바로 프라임 시장의 엄격한 상장 유지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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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부문인 프라임 시장에서 상장사 자격을 유지하려면, 주주 수 800명 이상, 유통 주식 시가총액 100억엔 이상, 유통 주식 비율 35% 이상, 하루 평균 거래 대금 2000만엔(약 1억8100만원) 등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

일본오라클은 낮은 유통 주식 비율에 발목을 잡혔다. 프라임 시장에 상장된 기업은 최대주주 일가가 주총 의결권을 독점하지 않도록 최소 35% 이상 지분을 시장에 유통해야 한다. 일본오라클은 모(母)회사인 오라클재팬홀딩스가 74%를 보유하고 있어 기준에 미달했다.

도쿄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2022년 4월 초만 해도 프라임 상장사는 총 1849곳에 달했다. 하지만 이달 22일 기준으로는 1642곳에 불과하다. 2년여 동안 상장사 수가 207개(11%) 감소했다.

도쿄증권거래소 관계자는 “프라임 시장의 엄격한 상장 유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기업들은 경과 조치를 둬서 일정 기간 개선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했어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자발적으로 상장 폐지 절차를 밟거나 혹은 중견 기업 위주인 스탠다드 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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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주식인데 하루 82만원 거래”

한국 주식시장은 투자 심리 위축과 유동성 감소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히면서 거래대금 불균형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다. 최상위 시장인 코스피에도 사실상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식물 상장사’도 늘어나고 있다.

2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9일 유가증권 시장 소속 800여곳 중 거래대금이 가장 적었던 기업은 포항 소재 철강업체인 동일산업이다. 이날 동일산업의 거래대금은 82만원으로, 거래량은 21주에 불과했다.

동일산업은 주가를 주당 순자산으로 나눈 주가순자산비율(PBR, 낮을수록 저평가)이 0.2배에 달해 극도의 저평가 상태이지만, 부진한 주가와 저조한 거래 상태로 방치되면서 주주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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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산업 소액 주주인 A씨는 “명색이 코스피 주식인데 하루 거래 대금이 100만원도 안 된다니 이런 기업이 왜 퇴출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일산업 주식이 하루에 82만원 어치 거래된 이날, 유가증권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했던 주식은 삼성전자로, 1조7900억원에 달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대표는 “거래 가뭄 기업들의 공통점을 살펴 보면 대부분 승계가 진행 중이거나 자녀 승계를 앞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비상장 기업일 때는 순자산 가치로 평가해 상속·증여세를 내야 하지만, 상장 기업은 시가로 가치를 따지므로 절세 전략상 (상장해서 주가를 낮게 유지하는 것이 승계 절차상) 유리하다”고 말했다. 물론 “대주주가 일부러 주가를 낮춘다고 입증하긴 어렵다”는 반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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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주식 승강제 도입 고려해 볼만"

미국도 일본처럼 거래가 거의 없는 ‘식물 상장사’에 대한 조치를 강화해 시장 건전성을 높이고 있다. 투자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시장 환경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부실 기업을 제때 퇴출하는 것이다.

올해 미국 나스닥에는 200여개 기업이 새로 데뷔했지만, 그 두 배인 400곳이 내쫓겼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9월부터는 종가 기준으로 1달러 미만이 30일 연속 지속되면 상장폐지 후보에 올리는 ‘동전주 퇴출 제도’도 새롭게 도입했다.

증권업계 관계자 A씨는 “한국 증시에도 거래량 미달시 관리종목으로 지정된다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실제 상장폐지까지 간 기업은 최근에 없다”면서 “거래가 안 되는 좀비 기업은 하위 시장으로 강등시키는 등 제도 개선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 B씨도 “현재 코스피에 있는 문제 기업들을 상장 폐지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코스피를 1부, 2부로 나눠서 승강제를 시행하는 방법도 고민해 볼만 하다”면서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주주환원책 등이 부실하면 1부에서 2부로 강등시키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1월 기준 유가증권 시장에서 하루 평균 거래대금이 1조5600억원으로 가장 많은 주식은 삼성전자였다. 반면 똑같은 유가증권 시장에 속해 있는 우진아이엔에스는 시가총액 245억원에 하루 평균 거래대금이 779만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