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경제계는 중견 가전업체인 후나이전기(船井電機)의 갑작스러운 파산 소식으로 충격을 받았다. 후나이전기는 지난 10월 470억엔(약 4390억원)의 막대한 부채를 안고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후나이전기 직원 2000명은 하루 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고 실직자로 전락했다. 일본 정부는 후나이전기에 의존하던 협력업체들의 연쇄 도산 가능성과 실직 대란을 우려하는 중이다.
한때 연 매출 4조원에 육박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후나이전기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본 중견기업의 흥망성쇠를 [왕개미연구소]가 추적해 봤다.
✅연 매출 4兆... 美 가전 시장에서 돌풍
지난 1961년 후나이테츠로(船井哲良)씨가 창업한 후나이전기는 LCD TV와 VCR(비데오테이프 녹화기), 프린터 등을 만들던 강소 가전업체다. 원래 재봉틀 도매상으로 시작했지만, 마츠시타고노스케(파나소닉 창업주)의 비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전자제품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90년대에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합친 ‘텔레비데오’라는 혁신 제품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1997년엔 미국 대형 할인점인 월마트와 거래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원가 절감의 선구자’로 불릴 정도로 가성비 높은 제품을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당시 후나이전기는 미국 시장의 판매 가격을 기준으로 역산해서 생산 원가를 산출하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했다. 또 마치 신선식품처럼 출하량에 따라 부품을 조달하는 무재고 생산으로 비용을 최소화했다.
후나이 제품은 실용적이면서 값싼 상품을 선호하는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월마트 점포 2500여곳에서 VCR 100만대를 단 5시간 만에 판매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2000억엔 정도였던 매출은 2007년 3967억엔을 찍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세대 교체 실패로 경영 파탄
전자제품 산업은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트렌드와 소비자 요구에 대한 민첩한 대응이 핵심이다. 후나이전기는 LCD TV로 미국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한국 삼성전자와 일본 소니그룹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북미 시장을 장악하면서 고비가 찾아온 것이다. LCD 패널과 같은 핵심 부품 조달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생산 효율성도 떨어졌다
2008년, 81세였던 고령의 창업주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후나이전기를 세계 시장에서 성공적인 가전 기업으로 이끈 키맨(핵심 인물)이었다.
의사인 아들 후나이테츠오(船井哲雄)씨는 가업을 잇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다. 적절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회사는 오랜 경영 공백이 이어졌고, 혁신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3년새 사장이 4번이나 교체되는 등 극심한 리더십 혼란을 겪었다.
설상가상 중국산 저가 제품들이 북미 시장 공세를 강화하면서 후나이전기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다.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북미 시장에서 후나이전기의 LCD TV 점유율은 2012년 13.5%로 높았지만, 2023년에는 2.8%로 급락했다.
✅사라진 회사 현금 3240억원
2017년 창업주가 사망하면서 병원장인 아들이 지분을 물려 받았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 사업을 물려 받을 생각이 없었고, 2021년 컨설턴트 출신인 48세 출판사 사장에게 회사를 매각했다.
후나이전기를 인수한 출판사 사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후나이전기를 상장 폐지하는 것이었다. 상장사는 경영 실적과 관련된 보고 의무가 있지만, 비상장사가 되면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외부 감시를 받지 않기 때문에 비상장사 경영진은 자유롭게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
2023년 출판사 사장은 별도의 지주회사를 세워 ‘탈모살롱체인’을 인수했다. 사업 다각화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 3월 서둘러 매각했다.
일본 언론들은 출판사가 후나이전기를 인수한 이후 보유하고 있던 현금 347억엔(약 3240억원)이 빠르게 소진된 점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회사 내 현금 감소는 거액의 자금 유출이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경영 투명성에 대한 의혹이 커지고 있다.
특히 출판사 사장인 우에다 도모카즈(上田智一)씨가 후나이전기 파산 직전인 지난 9월 27일 대표이사 자리에서 자진 사퇴한 점은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의 사임이 경영 위기를 피하려는 책임 회피였는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2일 일본 잡지 다이아몬드 온라인은 “우에다씨는 재임 기간 중 경영진과 의사 결정과 관련해 공유하지 않았고, 단 3년 반 만에 저력 있는 강소 가전업체를 파탄냈다”면서 “출판사가 인수하지 않았다면 후나이전기는 이렇게 쉽게 파산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직원들 단체 해고 통보 날벼락
“회사 파산으로 즉시 해고입니다. 내일 급여는 지급하지 못합니다.”(회사 측 변호사)
후나이전기의 파산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직원들이다. 급여일을 하루 앞둔 지난 10월 24일, 후나이 본사 직원 500명은 구내 식당에서 단체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회사가 다음 날 종업원들에게 지급해야 할 급여는 총 1억8000만엔(약 17억원)이었는데, 가용 자금은 1000만엔(약 9300만원) 뿐이었다.
후나이전기의 자회사는 총 31곳이고, 채권자 수는 524곳에 달한다. 대부분은 중소 협력업체라는 것이 일본 언론들의 분석이다. 한 신용조사업체 간부는 “후나이전기 파산으로 연쇄 도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강소기업 후나이전기의 파산은 전자 제품 산업에서 리더십과 혁신의 연속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후나이전기는 카리스마 창업주가 물러난 이후 경영 공백이 장기화되면서 본업에서의 경쟁력을 잃었고, 비효율적인 사업 다각화와 자금 유출 의혹 속에 결국 63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